나현 감독의 ‘프리즌’은 감옥에서 세상을 굴리는 절대 제왕(한석규 분)과 새로 수감된 전직 꼴통 경찰(김래원 분)의 범죄 액션 영화. 무엇보다 교도소에 대한 당연한 상식과 고정관념을 깨면서 출발한 이야기이다.
‘익호’ 역의 배우 한석규 역시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가 밖으로 나가 범죄를 저지르고, 다시 돌아와 완벽한 알리바이를 완성한다는 작가적 상상력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고 전했다.
27년이 넘는 시간 동안 ‘초록 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음란서생’, ‘베를린’ 등 한국 영화의 역사와 함께 걸어온 ‘연기의 신’ 한석규가 인생 최초의 완벽한 악역을 연기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매체 인터뷰를 꺼리는 걸로 유명한 그가 오랜만에 취재진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프린트 된 ‘보도자료’를 천천히 읽어보고 있던 한석규는 기자들의 등장에 환한 미소를 내보이며 질문 하나 하나에 신중하게 답변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시대를 거스르듯 천천히, 그리고 깊게 답하는 그와의 인터뷰 시간이 누군가에겐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조율해야해 번거로움을 동반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의 말을 천천히 되새기고 있다 보면, 꽤나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 이어 기분 좋은 ‘현기증’(?)이 몰려온다.
그래서 이번 인터뷰는 언제든지 펼쳐보고 싶게, ‘한석규 국어사전’으로 정리해봤다. △ 배우 △ 몰입 △ 연기자 △ 연기 변화 △ 캐릭터 △ 연기 쾌감 △ 재미 △ 인내 △ 신인감독 △ 꿈 △ 프리즌, 이렇게 총 11가지 한석규 표 용어를 공개한다.
1. 배우
사람과 사람이 사는 일을 보여주는 게 일인 사람. 배우가 희망을 통해서 혹은 고통을 통해서 보여주는 2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능하다면 저는 희망을 통해서 ‘사람’을 보여주고 싶다.
2. 몰입
배우에게 ‘너는 어떻게 캐릭터에 접근해?’라고 물어보는 질문이다.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재미 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배우들과는 그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배우들과 ‘몰입’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보고 싶다.
3. 연기자
카메라랑 제일 가까운 사람이 연기자이다. 이놈의 ‘연기’라는 게 카메라에 가까이 갈수록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게 많아진다. 카메라가 내 앞에 찰싹 달라붙어 코 앞에서 찍어대고 하니까. 저도 옛날에는 저 뒤에서 무슨 장면을 찍는 지도 모르고 (장면을 위해)차를 막았다면, 조금씩 조금씩 카메라에 가까워지게 됐다. 뭘 찍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채 온 몸을 던지는 친구들의 노고를 내가 등에 다 업고 카메라 앞으로 가는거죠.
연기자라는 직업이 현대의 어느 직업보다도 사람에 대해 가장 고민하고 공부할 수 있어 진짜 최고의 직업이다. 잘못하면 루저 처럼 보일 수도 있다(웃음)
4. 연기 변화
이번엔 악역을 했으니까 연기 변화를 의식적으로 시도했다? 정말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입 주변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제가 어떻게 하면 연기를 안 할까? 그 생각에만 매달려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이 참 맞지 않는 말이다. ‘연기’를 영어로 액트(act)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뭔가 하는 건데, 난 ‘어떻게 하면 안 해볼까?’를 생각 중이다. 역발상이 아니라 ‘뭐든지 해서 탈이구나’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서이다. 하는 게 중요하지만 안하는 게 더 중요하다.
5. 캐릭터
내가 생각하는 사람(캐릭터)이란 뭔가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표현이 될까? 인물을 ‘악역이다’, ‘선하다’ 이렇게 구분하지 않는다. 선악이 없는, 환경에 따라서 바뀌는 불완전 사람이 캐릭터이다. 불완전하지만 꾸준히 도전하는 인물이라고 할까. 아니 완성할 필요도 없는 인물이다.
6. 연기 쾌감
악역 연기에 대한 쾌감이란 표현의 의미는 잘 모르겠다. 저는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게 뭔가에 대해서 더 생각해요. 전 연기를 통해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게 일인 사람이잖아요. 예전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모든 걸 봐야 한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어요. 지금은 제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제가 제일 생각 해 낼 수 있는 사람. 그런 인물을 만들어낼 때 제일 괜찮게 할 수 있어요.
7. 재미
새로운 작품을 받고, ‘내가 어떻게 표현 할까?’ 그런 즐거움 보다는 제가 저를 보는 재미, 즉 내가 내 연기를 보는 게 재미있어요. 관객들을 배신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요. 관객 분들을 무시하는 게 아닌 ‘이 양반, 이것 봐라’ 라는 반응을 보이듯이요.
재미로 따지면 그래요. 그게 즐거운 재미라기 보다는 자학적인 재미다. 그래서 우리 연기자들을 ‘자학적인 존재’라고 한다. 스스로의 연기를 보고, ‘여태 그거냐’란 생각에 스스로 고개 숙이고 몸서리를 치는 경우가 많아요. 몸서리 치는 게 조금은 잦아들 수는 있어도 ‘와! 잘한다’라고 스스로에게 평가를 내리는 연기자는 없을거다.
8. 인내
이루고 완성한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참고 기다리면서 계속 하는 것’이다. 인내라는 단어가 괜찮나. 안달 할 필요 없다. 젊었을 땐 ‘완성’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뭔가를 이루고 정복하려고 한다.
더 중요한 건, ‘한다. 하고 있다’ 이다. 걸음으로 말하면, 어딘가에 도착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닌 거기를 향해 계속 가고 있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다 왔다’ 막상 가보니까 별거 아니다. 그러면 또 가는거죠. 그렇게 계속 가고 있는 게 중요하다. 기어가든, 뛰어가든 상관없이 말이다. 너무 빨리 갈 필요도 없고, 꾸준히 다치지 말고 계속 가는 게 그게 더 의미 있다. ‘인내’가 중요한 일이다.
9. 신인감독
목숨 걸고 뛰어드는 사람.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하는 좋은 동료이다. 무엇보다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처음이라 쉽지 않지만 이게 잘 이어지면 두 번째 때는 좀 더 나은 조건에서 할 수 있고, 세 번째까지 이어진다. 저 역시 그랬으니 나현 감독에게 ‘이를 악물고 해보세요’라고 말 했어요. ‘닥터봉’(1995), ‘은행나무 침대’(1996), ‘초록 물고기’(1997) 이 세 작품을 하고 나니, 또 다른 작품이 들어왔어요. 그렇게 저의 또 다른 걸 펼칠 기회가 왔어요. 신인감독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10. 꿈
내 소원이자 꿈이 임권택 감독의 ‘짝호’(1980)를 리메이크 해보는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다 닮고 있는 영화로, 점수로 표현하라고 하면 90점 이상의 영화이다.
제가 꿈꾸는 무대는 60분짜리 중편 시나리오 하나를 2팀이 따로 영화를 찍어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프로젝트이다. 서로 어떻게 작업하는지 모른 채 완성시킨 뒤 120분짜리 영화로 붙여서 하나의 제목으로 극장에 걸리면 어떨까. 똑같은 내용인데 연출과 연기자가 다르게 완성시키는거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느낌이 궁금하다. 연기자들도 같은 글을 사람마다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고 접근할 수 있는지 느끼게 될 것 같다.
11. 프리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통해서 느꼈던 걸 ‘프리즌’ 속 익호란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교도소는 물론 세상까지 손아귀에서 굴리려는 ‘익호’는 감방 내 죄수들을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무엇보다 ‘완벽하게’ 복종시킨다)
영화의 메시지라면...야...재미 없을 실 텐데, (기자들의 짧게 말 해 달라는 요구에)짧게요? 해 볼 랍니다. 당시에는 ‘군주론’이란 책이 금서였어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방법을 써 놓았으니까 못 보게 한 거죠. 뭐라고 해야 하나? 궁극적으로 ‘권력 통치자’라는 좋은 단어를 쓰는데, 그건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의미다. 현실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 종류의 책이잖아요.
영화의 부제인 ‘영원한 제국’의 익호를 통해서 현실 속에서 없어져야 할...그런 생각까지는 아니다. ‘군주론’ 그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걸 익호란 인물을 통해서 만들어보고 싶었다.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