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곧 아들 생일...'진실' 선물해 주고파"

故 김건우 학생 父 김광배씨



“아빠, 선생님이 불러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지난 2014년 4월 15일 밤 7시 무렵, 단원고 2학년 5반 고(故) 김건우 학생의 아버지 김광배(사진)씨는 아들 건우와 통화하던 중이었다. 건우는 날씨가 안 좋아 출발을 못했다며 제주도에 도착해 전화하겠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출근길에 아내의 전화로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들었다. 단원고로 달려가며 아들한테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었다. “고객의 사정에 의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같은 신호는 사흘 동안 이어졌다.

건우를 다시 만난 건 참사 한 달 뒤인 5월 15일. 뭍에서 만난 건우는 떠나던 옷차림 그대로, 어머니가 첫 월급 타서 사 준 실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열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모두 절단돼 있었다. 배 안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는 건우 모습이 떠올라 눈 앞이 아득해졌다. 시신을 꼭 안고 수없이 되뇌었다. 절대로 용서 안 할게, 꼭 밝혀낼게 아빠가. 건우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약속이었다.

아들을 떠나 보낸 후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아버지의 일상은 180도 달라졌다. 다니던 전기공사 회사 대신 416가족협의회 사무실로 출근도장을 찍었다. 3년 동안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인양 관련 자료를 검토하거나 분향소를 찾아 온 방문자들과 간담회를 했다. 달에 세 번 분향소·광화문·동거차도에서 당직을 설 땐 평생 듣지도 못했던 ‘유실방지망’, ‘리프팅 빔’과 같은 단어를 밑줄 쳐 가며 공부했다. 김 씨는 “해수부에 직접 자료를 요청하고 감시해야 하다 보니 가족들이 인양 과정을 직접 공부하게 됐다”고 설명했다.생활비는 안양에 있는 집을 팔고 국민들의 성금을 받아 마련했다.


마침내 지난 24일, 수면 위 세월호를 맞이한 김씨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토록 바라던 선체가 모습을 드러낸 건 기뻤지만 유가족들은 선체의 인양과정을 망원경으로만 지켜봐야 했다. 인양이 시작된 2015년 8월부터 해양수산부는 인양 과정을 참관하게 해 달라는 유가족 측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체에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유가족들은 일일이 주변 어선의 선주들을 만나 참관을 요청해야 했고, 수십 척의 어선과 연락한 끝에야 한 선주의 도움으로 현장에 다가갈 수 있었다. 해수부는 유가족의 동거차도 천막마저도 수색에 부담된다며 넌지시 철거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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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과의 불통 문제는 인양 과정 중에도 발견됐다. 해수부는 2015년 7월 ‘플로팅독’ 공법으로 세월호를 인양하기로 결정했으나 1년 간 선체 잔존유 제거 등 시행착오를 겪자 지난해 11월 ‘텐덤 리프팅’으로 인양 공법을 바꿨다. 모든 과정에서 유가족은 협의 대상이 아닌 일방적 통보 대상이었다. 선체에 140여 개의 천공을 뚫고 스테빌라이저 등을 절단하는 과정도 모두 추후통보였다. “미리 협의를 하면 되는 건데 해수부쪽에서 다 해 놓고 나중에 이해하라는 식이니 답답한 겁니다. 우리 유가족들 그렇게 꽉 막힌 사람들 아니거든요.”

김씨가 동거차도에서 세월호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동안 건우의 생일도 가까워 오고 있다. 건우의 생일은 오는 4월 8일. 건우와 친했던 친구들의 부모와 함께 생일 케이크를 장만해 납골당을 찾을 계획이다. 드럼 연주를 좋아했던 건우의 납골당엔 지금도 건우가 쓰던 드럼 스틱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별이 된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진실을 찾아주는 것뿐입니다. 침몰하는데 5시간 이상 걸린다는 6,000톤의 여객선이 왜 2시간 만에 침몰했는지, 그 원인 밝혀내는 게 울 아들한테 줄 수 있는 생일 선물이겠죠.”



신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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