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오후 2시 서울 성동구 왕십리CGV에서는 이윤기 감독, 배우 김남길, 천우희가 참석한 가운데 영화 ‘어느 날’ 언론배급시사회가 진행됐다. ‘어느 날’은 아내가 죽고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다,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진 여자의 영혼을 보게 된 남자 강수(김남길)와 뜻밖의 사고로 영혼이 되어 세상을 처음 보게 된 여자 미소(천우희)가 서로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
먼저 이 영화를 보기 전, 이윤기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겠다. 비록 이전 작품들에서 주를 이룬 멜로와는 또 다른 감성 판타지 드라마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어느 날’은 이윤기 감독 특유의 세밀하고 정교한 감성기반의 연출이 여전히 돋보인다. ‘남녀의 관계’를 주된 소재로 삼는 이윤기 감독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거창한 에피소드로 풀어내기보다 인물의 심리를 섬세한 시선으로 따라가며 담아내왔다.
‘어느 날’은 이러한 감독의 장기가 ‘효과’를 발휘하는 데까지 발전한 작품이다.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이 ‘남자’ 강수와 ‘여자’ 미소라는 정보만으로 생길 수 있는 ‘또 하나의 멜로’라는 선입견은 과감하게 반전된다. 이 영화를 ‘감성 멜로’가 아닌 ‘감성 판타지 드라마’라고 고집한 명목은 확실하다. 영화에서는 아내를 잃은 상실감으로 아무런 희망 없이 사는 보험회사 과장 강수와 교통사고 후 영혼으로 깨어난 미소가 서로의 육체보다 영혼을 어루만진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선에 처절하게 올라서본 이들의 독특한 경험은 곧 두 남녀를 ‘의식의 동반자’로 만드는 근간이 된다. 유사한 처지에서 서로의 상처를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둘이기에 강수에게만 미소의 영혼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면부지의 두 남녀가 두어 번의 만남만으로 급격히 마음을 터놓고 이렇다 할 로맨스 없이 줄곧 함께하는 과정이 심심하지 않다.
앞서 ‘여자, 정혜’(2005), ‘멋진 하루’(2008), ‘남과 여’(2016) 등으로 보인 특유의 감성 멜로로 남녀 간의 사랑을 스케치한 이윤기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로맨스’를 과감히 배제하고 ‘이해와 공감’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 영화 속 남녀를 ‘의식의 동반자’로 설정했다. 상실감으로 인한 두 사람의 처연함은 영화 배경에 그대로 함축돼 전달된다. 이내 힘을 잃고 떨어지는 벚꽃잎, 노을 지는 하늘, 쓸쓸한 바닷가 앞에 자리하는 강수와 미소의 모습이 더욱 아리게 다가오는 이유다. 줄곧 잔잔하게 펼쳐지는 배경음악과 음향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감정의 증폭을 조종하는 피아노 선율부터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파도와 갈매기 울음소리까지 세심하게 감성을 파고든다.
김남길과 천우희의 호흡은 기대만큼 안정적이다. 다량의 대사보다 눈빛으로 심경을 전하는 두 배우는 한결 깊이가 더해졌다. 유일하게 오가는 작은 스킨십으로 서로를 기억하고 상처를 보듬는 이들의 내면연기는 아련함으로 가득하다. ‘곡성’에 이어 두 번째로 영혼을 연기한 천우희는 세상을 처음으로 본 순수함과 발랄한 귀여움, 그리고 청순함 뒤에 숨겨진 상실의 아픔을 모두 오간다. 특히 시각장애인 설정이 제약이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이 돋보인다. 김남길 역시 아내를 잃은 애잔함과 아픔, 고독감, 그리고 폭발적인 슬픔까지 두루 소화해낸다.
4월의 시작과 함께 따스한 봄을 타고 찾아오는 영화 ‘어느 날’은 수많은 강수와 미소들에 잔잔하게 스밈 그 자체만으로 큰 파동을 그리겠다. 4월 5일 개봉.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