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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톡] ‘역적’이 시청자 마음을 훔치기까지…황진영 작가의 ‘빅 피처’

‘빅 피처’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나중의 일을 예상하고, 한 눈에 보기 어려운 큰 그림을 그린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드라마 속에서는 가볍게 지나쳤던 여러 설정이 모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때, 작가의 빅 피처가 통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월 30일 첫 방송을 시작해 이제 막 2/3 지점을 지난 ‘역적’이 그렇다. 극 중 곳곳에 넣어 놓은 설정은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하나씩 풀려가고, ‘역적’의 짜임새는 더욱 촘촘해진다. 이 부분에서, 황진영 작가의 역량이 증명되고 있다.




/사진=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사진=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1. 홍길동의 ‘가족애’가 곧 ‘인류애’

지난 3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 시청자들을 소름 돋게 만든 장면이 있다. 연산(김지석 분)과 길동(윤균상 분)이 같은 생각에서 가지를 뻗어나가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는 부분이다. 한 명은 인류애로 확장하고, 한 명은 자기애로 회귀한다.

먼저 길동이다. “양반은 양반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종은 종답게 살아야 한다는데, 묵고 싸고 자고 말하는 것이 다 똑같은디”라며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치를 은연중에 깨닫는다. 장면이 바뀌고, 연산 또한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양인과 천인이 다르다고 사대를 세우지만, 사실 그건 다 지들 편하자고 하는 개소리다”라며 비슷한 생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사는 전혀 다르다. “모두, 나의 종일뿐이야”

연산과 길동의 차이가 아주 직접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앞으로 10여 회 남은 ‘역적’에서 두 사람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를 것을 암시한다. 허나, 길동이 처음부터 인류애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릴 적 길동은 영웅의 성정이 아니었다. 단지 아버지인 아모개(김상중 분)의 뜻을 따라 가족들의 안위에만 신경써왔다.

가족 사랑만큼은 지극했던 길동은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동생 어리니를 찾는다. 숙적 충원군(김정태 분)을 찾아가 어리니의 행방을 묻고, 행록에서 어리니를 봤다는 힌트를 얻는다. 그런데 그 ‘행록’이 심상치 않다. ‘수귀단’이라는 명단이 적혀있다. 어리니를 만나기 위해서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지킬 수에 귀할 귀를 쓰는 ‘수귀단’은 사실 양반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거대한 비밀 조직이다. 인·의·예·지·신이라는 강상의 법도에 잘못 사로잡혀 백성들을 잔혹하게 휘두른다. 이 모습을 본 길동은 아무 죄도 없이 핍박받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자각한다. 그리고 그는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수귀단 일원들을 차례로 처단하기 시작한다.

/사진=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사진=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2. 홍길동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제야 길동에게 영웅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허균의 ‘홍길동전’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황진영 작가는 소설 속 도인 홍길동이 아닌 실제 연산군 시절을 살았던 홍길동을 모델로 삼았다. 연산군일기에 5회, 중종실록에 4회, 선조실록에 1회 기록되기까지 한 실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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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 측은 “홍길동은 1446년경 장성 황룡면 아치실 마을에서 함경도 경성절제사를 역임했던 아버지 홍상직과 기생노비인 옥영향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며 “대낮에도 행동을 불사하고, 법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관부까지 드나들며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했다”고 설명했다. 황진영 작가는 그 홍길동에 주목했다.

물론 드라마의 주인공인 만큼, 약간의 양념은 가미했다. 우선 홍길동을 서자가 아닌, 당시 시선으로 볼 때, 천하디 천한 씨종(대대로 종노릇을 하는 사람)의 아들로 설정했다. 여기에 ‘아기장수’ 설화도 가져왔다. 조선 건국 후 백년 만에 나타난 역사(力士)라며 길동에게 괴력을 안겨줬다.

그렇지만 이것이 길동을 단 하나의 영웅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아모개로부터 이어진 인연인 소부리(박준규 분), 용개(이준혁 분), 일청(허정도 분), 세걸(김도윤 분), 끗쇠(이호철 분) 등의 ‘홍길동 사단’이 곧 이야기의 중심이다. 성씨도 없던 이들은 아모개로부터 ‘떠들썩할 홍’이라는 성을 부여받고 ‘7명의 홍첨지’로 거듭난다.

‘홍길동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는 비밀이 여기서 풀린다. 우리의 홍첨지들은 가면을 쓰고 각자 흩어져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준다. 그야말로 신출귀물 홍첨지다. 이러니 누구에게는 홍길동이 아주 키가 큰 사람으로, 누구에게는 아주 잘생긴 사람으로, 또 어느 누구에게는 늙고 머리숱도 없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사진=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사진=MBC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황진영 작가의 빅 피처는 이미 성공적이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제작진은 앞서 기획 의도를 통해 ‘도인 홍길동’이 아니라 ‘인간 홍길동’을 그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특별한 포부를 지닌 영웅이 아니라,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비상식적인 일에 시원하게 한 방 날려주는 이웃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다.

그렇게 ‘역적’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훔치겠다고 선언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지닌 가족애를 전 인류적으로 확장시키고, 특별하지 않은 여러 사람이 홍첨지라는 의인이 되는 과정을 통해 이 같은 기획 의도를 실현하고 있다. 30부작이라는 짧지 않은 호흡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게 그려둔 밑그림을 바탕으로 선명한 채색 작업을 하고 있는 ‘역적’의 행보에 주목하는 이유다.

/서경스타 양지연기자 sestar@sedaily.com

양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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