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산업혁명’은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이 처음 언급하며 시대의 키워드가 됐다. 4차 산업혁명은 여러 기술의 융합을 통해 삶의 구조 자체를 바꾼다는 점에서 앞선 세 차례 산업혁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국내 법조계도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미국 로펌 베이커앤드호스테틀러는 지난해 5월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AI) 변호사 ‘로스’를 채용했다. 슈퍼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로스 변호사는 1초에 80조번 연산을 하고 10억장의 문서를 검토한다고 한다.
피할 수 없는 환경 변화는 법률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인간 본질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법률가로서 인간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따로 있다. 법률가의 일은 특정 데이터를 입력하면 정해진 값이 나오는 기계적 절차가 아니다. 법관의 판결과 변호사의 변론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단지 법리 분석이나 증거 정리가 완벽해서일까. 그렇지 않다. 그 안에 담긴 오랜 숙고와 법률가 개인의 가치관과 철학, 타인에 대한 이해가 공감과 감동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동일한 사안도 인간의 눈으로 보면 달리 판단될 수 있다. 가령 우리 법원은 공해나 의료사고로 인한 사건에서는 일반 민사 손해배상 사건과는 다르게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고 있다. 기업이나 의사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 피해자와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최근 도입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마찬가지다. 제조사의 고의로 소비자의 생명과 신체에 중대한 손해를 입힌 경우 최대 세 배까지 배상하도록 했다. 제조업자가 악의적 가해행위를 통해 약자인 소비자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징벌적’ 성격의 무거운 책임을 부과해 도덕적 해이를 막고 정의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효율성과 경제성만을 목표로 하는 AI에게서 약자에 대한 배려와 따스한 연민이 담긴 이러한 법적 판단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법률가들이 다뤄야 할 일에는 국민 모두의 삶과 직결된 정치적이고 도덕적으로 엄중한 사안도 많다. 최근 대통령 탄핵 결정을 끝으로 법관 생활을 마친 이정미 헌법재판관은 퇴임사에서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라는 말로 탄핵 결정의 소회를 대신했다. 1초에 10억장의 문서를 검토하는 AI에게 이 같은 ‘고통스러운’ 결정을 맡길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인간이 인간 됨을 유지할 때 AI는 위협이 아니라 인간 본질의 가치를 찾고 극대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법률가들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오히려 인본주의, 인간에 대한 헌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4차 산업혁명은 법률가들에게 그동안 잃었던 진정성을 찾을 수 있는 멋진 기회다. 김현 대한변호사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