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초호황' 한국 반도체 산업, 쾌속항진은 계속될까 ②

4차 산업혁명 발맞춰 '시스템 반도체' 시장 확대 나서야

이 기사는 포춘코리아 2017년 3월 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반도체 최강국’.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상을 나타낼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실제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DS(Device Solution)부문 임직원들은 스스로 ‘세계 1등’이라고 말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건 실적이 입증하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은 2016년 한 해에만 13조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영업이익을 올리며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정점에 올라섰다. 여기에 ‘신흥 강자’로 불리는 SK하이닉스까지 더하면 우리나라는 문자 그대로 ‘세계 최고 반도체 강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대단한 성과에 자만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와 연산을 수행하는 ‘시스템 반도체’로 나뉜다.
한국은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러나 시스템 반도체로 눈을 돌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우리나라 시스템 반도체의 전 세계 시장 점유율은 5%를 밑돌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빅데이터, 자율주행차 등을 구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시스템 반도체 부분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중국의 추격도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최근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메모리 반도체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반도체굴기(.起)’를 선언한 중국은 앞으로 10년간 1조 위안을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한국 메모리 반도체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다.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고 4차 산업혁명의 요체인 시스템 반도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란 얘기다.
반도체 산업은 한번 뒤처지면 다시 따라붙기 힘든 분야다. 힘겹게 쌓아 올린 명성을 잃지 않으려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야 한다. 포춘코리아가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와 걸림돌, 앞으로의 성장 방향 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았다.


취약한 ‘시스템 반도체’
안타까운 일이지만 반도체 시장의 대세는 시스템 반도체로 기울고 있다. 세계반도체무역통계기구(WSTS)와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시장규모는 3,473억 달러였다. 우리 돈으로 치면 390조 8,000억 원. 이 가운데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3%인 807억 달러, 원화 90조 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300조 원 가량이 시스템 반도체 시장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반도체 업체들은 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빠른 속도로 ‘세계 1위’에 오른 메모리 반도체와 다를까. 전문가들은 사업 초기에 투자 기회를 놓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한다. 단순히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는 소품종 대량생산이 특징이 특징이기 때문에 제조공정이 정형화되어 있다. 이와 달리 시스템 반도체는 활용 분야가 다양하다. 마이크로컴포넌트(각종 전자제품 작동에 필요한 수많은 명령을 담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나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아날로그 반도체 외에도 이미지 센서 등 여러 형태의 시스템 반도체가 있다. 그 용도에 따라 설계와 생산 공정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이세철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말한다. “대규모 장치 산업에 강점을 지녔던 한국 기업들은 반도체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제조 공정이 복잡하고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 대신, 자신들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했습니다. 일종의 ‘선택과 집중’ 전략을 쓴 거였죠. 그 결과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 반도체에 대한 투자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하는 동안, 인텔과 퀄컴 등 선진국 반도체 업체들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견고하게 구축해나갔다. 예컨대 CPU는 인텔이 최강자이고, 모바일 기기용 AP는 퀄컴이 가장 앞서 가고 있다. 이처럼 인텔이나 퀄컴 등이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독주를 하는 건 이 회사들이 만든 시스템 반도체가 시장에서 표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컴퓨터 제작 업체들은 인텔이 만든 CPU에 가장 적합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다. 만약 인텔을 대신해 CPU 시장에 진출하려면 수많은 컴퓨터 부속물들의 표준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 이는 엄청난 자본과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이동통신 칩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퀄컴도 마찬가지다. 이동통신의 표준과 시스템을 주관하며 표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퀄컴을 대체해 통신 칩 시장에 뛰어들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술이 발전하는 반도체 업종 특성상, 십여 년 늦게 출발한 후발업체는 그 격차를 따라잡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시스템 반도체 부문이 엄청난 시장이란 걸 알면서도 우리 업체들이 쉽사리 공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2014년 준공한 삼성전자 중국 시안 메모리 반도체 공장 전경. 총 35만 평 부지에 연면적 7만 평 규모다2014년 준공한 삼성전자 중국 시안 메모리 반도체 공장 전경. 총 35만 평 부지에 연면적 7만 평 규모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반도체 산업에서 지속 성장하려면 시스템 반도체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사물 인터넷(IoT),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자율주행차 등 때문에 시스템 반도체의 적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에만 치중해선 진정한 반도체 강국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말한다. “(지금이라도) 투자를 통해 취약한 시스템 반도체의 경쟁력을 키워야 합니다. 삼성전자를 제외한 국내 시스템 반도체 업체들은 규모가 영세합니다. 따라서 정부와 기업이 중장기적인 로드맵을 갖고 체계적으로 육성을 해야 합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팹리스를 키우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2월 기준 협회 회원사로 등록한 팹리스는 77곳이다. 이들 대부분은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팹리스는 1∼2곳에 그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트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세계 50대 팹리스 중 한국 업체는 ‘실리콘웍스’가 유일했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시스템 반도체를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인재 육성을 꼽았다. “시스템 반도체를 육성하려면 기본적으로 창의적 인재가 필요합니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이 같은 인력을 ‘융합인재’라 말할 수 있겠죠. 이들이 가진 역량을 활용하면 다른 산업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 반도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대학의 모든 공학계열 학과를 대상으로 한 반도체와 ICT 분야 기본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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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무서운 추격
최근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메모리 반도체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위협요인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중국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약진하고 있다. 미래 산업 주도권을 쥐기 위해 중국 정부가 전략적으로 시스템 반도체를 육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모만으로 보면 중국은 이미 한국을 넘어섰다. 중국 팹리스 기업은 2015년 730여 개에서 지난해 1,360개로 1년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했다. 대표적인 기업이 하이실리콘이다. 우리에게 스마트폰 기업으로 널리 알려진 화웨이의 자회사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트에 따르면, 하이실리콘의 연매출은 3조 원을 훌쩍 넘고 있다. 국내 팹리스 약 200여 개 기업의 매출을 모두 합쳐도 하이실리콘보다 적다. 칭화유니그룹에 인수된 스프레드트럼 또한 매년 약 1조5,000억 원의 매출을 거둘 만큼 덩치가 커진 상태다. 세계 50대 팹리스(1위 퀄컴)에 한국 기업은 단 한 곳(실리콘웍스)만 포함된 반면, 중국 기업은 10개 전후 기업이 리스트에 올라 있다.
중국 시스템 반도체가 성장한 가장 큰 이유는 중국 내 스마트폰 시장이 급격히 확대됐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시스템 반도체 육성 정책과 학생들의 반도체 학습 의지가 맞물리고 있는 것도 좋은 성과를 내는 강력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중국은 아직 메모리 반도체 기술 경쟁력에선 한국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중국 업체들은 우리 기업에 비해 5~8년 기술력이 뒤처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만큼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선 확실한 위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부문에서도 안심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3월 중국 국영 반도체업체 XMC는 허베이성 우한에서 메모리칩 생산 공장 건설 기공식을 열었다. 3단계로 진행되는 공사에서 XMC가 투자하는 금액은 240억 달러( 27조 원) 규모다. XMC는 이르면 2018년부터 한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력 제품인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메모리 반도체는 세계 시장을 과점하고 있어 한국 반도체 업계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마찬가지다.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한 인수합병(M&A)도 무서울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인텔, 퀄컴 등과 합작해 생산시설을 유치하기도 했다.
중국 업체들은 한국과 대만, 일본의 기술인력 영입에도 힘쓰고 있다. 이들은 물밑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퇴직 직원들을 긴밀하게 접촉해왔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말한다. “중국 업체들이 기존 연봉의 5~10배를 제시하면서 기술 인력 스카우트에 나서고 있어요. 주로 장비를 구매하던 직원들이 대상인데, 업계에선 이들을 코디네이터라고 부릅니다. 반도체 원천기술을 빼내지 못해도 코디네이터를 잘 활용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수준의 설비를 갖추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죠. 5년 내에 반도체 코리아의 위상이 꺾일 수 있다는 우려가 많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중국은 매년 2,0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를 수입하고 있다. 석유 수입액보다 많은 돈을 반도체에 쏟아 붓고 있다.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57%가 소비되는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현재 20%에 불과한 상황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인 중국이 반도체 시장을 기웃거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국내 업계는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중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주대영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말한다. “치킨게임이 재현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이지만, 경쟁이 심해진다는 건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거에요. 결국엔 기술 경쟁력에서 승부가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내 업체들에겐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 개발로 시장 우위를 더욱 강화하는 ‘초격차 전략’과 차세대 메모리 제품군 개발 같은 차별화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반도체 산업 육성 다시 시동을 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인텔, 퀄컴 등은 각각 메모리 혹은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파며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하게 구축해 왔다. 그런데 최근 이런 ‘한 우물 파기’ 현상이 깨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에, 인텔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뛰어 들며 서로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인텔은 ‘3D 크로스포인트’라는 무기를 앞세워 메모리 반도체 재진출을 선언했다. 3D 크로스포인트는 기존 D램보다 10배 많은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고, 낸드플래시에 비해 속도도 1,000배 빠른 것으로 알려졌다. 인텔은 중국 다롄 공장에 6조 원을 투자해 새로운 메모리 생산설비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맞선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적극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연구개발센터를 두 배로 확장하고, 시스템 반도체 관련 전문 인력 채용에 나서며 칼을 갈고 있다.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의 판매 호조 속에 자체 공급 중인 모바일 AP 부문도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인텔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영토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건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서다.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자율주행차 등 미래 먹거리 핵심이 모두 반도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반도체가 미래산업의 핵심이 된 이상, 메모리 혹은 시스템 반도체 하나만으론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도 반도체 산업 육성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최근 정부는 4차 산업혁명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2017년 반도체 산업 정책’을 발표했다. 사물인터넷(IoT) 가전, 전기차,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사용될 저전력·고효율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 핵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837억 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은 올해부터 2023년까지 추진될 예정이다.
올해 1월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 등이 공동으로 출자해 ‘반도체성장펀드’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반도체성장펀드의 기금 조성 목표액은 2,000억 원이다. 삼성전자가 500억 원, SK하이닉스가 250억 원을 출자했다. 양사가 출자한 모(母)펀드 금액 750억 원을 토대로 벤처캐피탈(VC) 민간자금 1,250억 원을 자(子)펀드로 조성해 총 2,000억 원 규모의 반도체성장펀드를 만들 계획이다. 이 돈은 반도체 기업 창업과 육성, M&A에 투자될 예정이다.
반도체성장펀드의 사무국 역할은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맡게 된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말한다. “반도체성장펀드는 국내 반도체 관련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 집중 투자할 겁니다. 이들이 반도체 설계, 제조, 장비, 소재 분야에서 첨단기술을 개발하고 혁신의 속도를 높여 나가길 기대하고 있어요.”
반도체 분야의 글로벌 기업 간 경쟁은 앞으로 더욱 격화될 것이다. 반도체는 타이밍이 중요한 업종이라 잠시만 주춤해도 주도권이 넘어갈 수 있다. SK로 인수되기 전까지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SK하이닉스는 지난 세월 제대로 된 투자를 하지 못한 걸 지금도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반도체 업계에게 다가온 절실한 과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끄는 원동력. 시스템 반도체다. 4차 산업혁명에서 성장 동력을 찾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에게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는 기술력과 전략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일본 반도체 업체의 몰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때다. 이젠 축배를 내려놓고 신발 끈을 다시 조여야 한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

하제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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