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가면을 쓰고 나타난 해괴한 비주얼부터 여성 연쇄 납치와 살인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일삼는 만행까지 소름끼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신스틸을 넘어 러블리한 드라마의 분위기 자체를 반전시키는 위력을 발휘했다. 장미관의 소름끼치는 연기 덕분에(?) 가위에 눌렸다는 시청자 반응까지 나올 정도였다. 단 한 명의 신인이 뿜어낸 이 같은 파급효과가 놀랍다.
최근 서울경제스타 본지에서 진행한 ‘힘쎈여자 도봉순’ 종영 관련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장미관은 극 중의 날카로운 면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순하고 선한 이미지였다.
“처음에 캐스팅 됐을 때는 이 정도로 큰 역할인지 모르고 부담 없이 연기했는데 촬영 하면서 점점 빠져들다 보니 연기하는 데 어려워지더라고요. 분량이 많아지면서 걱정도 됐어요. 감독님과 작가님께서 좋은 소스를 많이 주셨죠. 감독님께서 폭발적이고 사이코패스 기질이 센 걸, 광적인 걸 원하셨어요. ‘레옹’의 게리 올드만처럼 애초에 화가 많은 걸 표현하려 했죠. 감독님께서 촬영할 때 저에게 시간도 많이 주시고 현장에서 많이 끌어올려주셨어요. 그래서 안정적으로 연기할 수 있었죠.”
첫 드라마 작업임에도 완벽하게 악역을 소화한 배경으로는 제작진의 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장미관의 발언은 배우의 가능성을 믿고 안정된 호흡을 이끌어낸 감독의 역량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덕분에 김장현 캐릭터는 표면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고 영화 속 악역과 같은 깊이를 지닐 수 있었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크리스찬 베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하비에르 바르뎀처럼 타고난 사이코패스를 연상시킬 정도의 호연을 펼쳤다.
“하루에 12시간씩 촬영 준비를 했어요. 감독님과 소통을 많이 했는데, 제 의견을 많이 물어봐주셨어요. 야외에서 촬영하다보니 동선 정하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중간 중간 회의를 되게 많이 했어요. 감독님께서는 ‘사람들이 정말로 공포감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일단 소리를 정말 많이 질렀고, 직접 들고 간 몽둥이를 활용해서 어두운 곳에서 감정을 끌어올렸죠. 가면이라는 좋은 무기를 가지고 연기했어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가면은 확실히 살인마 김장현의 꺼림칙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돋우는데 큰 일조를 했다. 이는 장미관의 얼굴을 직접 본 따 자체 제작된 것. 막상 가면을 처음 접했을 때는 오히려 이 ‘생소한 무기’가 촬영장을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고.
“제작할 때만 해도 민머리 실리콘 가면일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처음엔 가면을 보고 엄청 웃었거든요. 제일 추운 날 초저녁이어서 촬영하기 힘들었는데, 처음으로 가면을 쓰고 스태프 분들을 웃겨드린 날이었죠. 이게 사실 잘 안 써져서 얼굴에 젤을 듬뿍 바르고 뒤집어썼어요. 그런데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고, 말도 못하겠는 거예요. 감독님이 지시하셔도 잘 못 알아듣는 고충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스태프 분들과 가까이서 소통하며 친해질 수 있었어요. 한참 가면을 쓰고 나면 얼굴에 소나기가 한 바가지 내렸어요. 착용감이 소름 돋거든요. 끝까지도 이질감이 있었죠.”
가면 때문에 현장에 웃음꽃을 피우다가도 적잖이 고생한 기억이다. 가면을 7~8시간씩은 꼬박 쓰면서 갑갑한 느낌은 촬영 막바지까지도 지울 수 없었다. 거기다 극 중 어두운 비밀 공간을 은신처로 삼느라 밤에 촬영이 이뤄진 것은 기본, 도봉순(박보영)과 대결하기 전 드라마 중후반부까지는 주로 혼자 촬영을 하면서 실제로도 성격이 어두워지더라고 고백하는 장미관이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평범한 역할만 해도 좋겠어요.”라는 너스레와 함께 웃음 짓는다.
‘도봉순’이 후반으로 치달으면서 김장현은 도봉순, 안민혁(박형식), 인국두(지수)와 직접 맞붙어 그야말로 목숨을 건 싸움을 펼친다. 극 중에서는 과격한 대결구도를 그렸지만, 촬영 현장에서는 또래 청춘 배우들 간의 훈훈한 케미를 보였다. 실제 ‘형, 동생’ 호칭부터 연기에서의 호흡까지 고루 어우러지는 현장이었다.
“박보영 씨는 워낙에 경험이 많은 선배님이셔서 같이 연기하는 데 부담되는 면도 있었는데, 먼저 다가와 말 걸어주시더라고요. 저희가 함께해야 할 신에 대해 현장에서 미리 상의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부담을 덜할 수 있었죠. 제가 못 해도 선배님이 잘 받아주셔서 NG도 거의 없었어요. 저는 감정적인 연기가 많았는데, 보영 씨에게 기술적인 테크닉도 많이 배웠어요. 실제로도 애교와 장난이 많은 선배였어요.”
“형식이, 지수와는 금방 ‘형, 동생’하면서 친해졌어요. 지수와는 범인과 형사 사이이다 보니 뜨겁고 열정적이었어요. 지수와의 신에서 서로 더 촬영해보겠다고 했던 게 생각나네요. 한창 촬영할 때 지수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연기에 대한 욕심이 커서 그런 걸 다 참아가며 연기하더라고요. 고마웠어요. 형식이도 보영 씨만큼 밝아서 현장에 오면 저를 앞에서나 뒤에서나 그렇게 많이 안고 살갑게 굴었어요. 연기하면서도 얻은 게 많아요. 형식이와 첫 촬영 때 액션을 했는데, 저는 처음 하는 액션이어서 실수를 많이 했거든요. 새벽에 형식이가 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을 텐데도 인상 한 번 안 찌푸리고 촬영하더라고요. 동생인데도 경험이 많다보니 저를 많이 챙겨줬어요.”
아직 촬영장에 한창 적응해야할 시기인 장미관은 첫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에서 친절한 제작진과 출연진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덕분에 앞으로의 작품을 향한 물꼬를 안정적으로 잘 틀 수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장미관은 공식 데뷔가 올해일 뿐, 연기를 시작한 건 무려 7년 전부터였다. 가장 처음 2009년 FW 뉴웨이브인서울 컬렉션 모델부터 서울컬렉션 모델, 잡지 GQ, 맥심, 맵스 모델로 활동한 후 일찍이 배우의 길로 전향한 것이다.
“모델 일을 할 당시에는 광고미팅과 인터뷰도 하고, 쇼를 하면서 연출적인 부분이 필요하다보니 회사의 권유로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어요. 처음 독백 대사를 받았는데, 연습 하는데도 떨리면서 대사가 안 나오더라고요. 런웨이에서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서도 안 떨었는데 말이죠.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태어나서 뭘 이렇게 못 해본 게 처음이어서 오기도 생겼고요. 그 순간부터 매일 연기 연습을 했어요. 모델 일은 금방 소화했는데, 연기는 해도 해도 스스로 해소가 안 되더라고요. 연기는 누구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여줄 가능성이 있는 평등한 작업이라 생각했어요. 열정적인 선생님을 만나서 덕분에 에너지를 많이 받았죠. 연극하고 단역도 했어요. 하지만 카메라 연기에 대한 벽을 느꼈죠. 그러다 군대도 갔다 오고 이제야 본격적으로 드라마를 하게 됐네요.”
장미관의 1차적인 계획은 서른에 안정적으로 연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도봉순’을 만나 목표를 이룬 것은 천운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장미관은 어릴 때부터 배우의 길을 직감했는지 ‘드라마광’인 학창시절을 보냈다. 졸면서도 아버지와 드라마를 챙겨 볼 정도였다. ‘올인’이 인생드라마이고 이병헌의 연기에 감탄했다. ‘태조왕건’, ‘허준’을 인상 깊었던 드라마로 읊으며 “‘천국의 계단’을 보고 김태희 선배님이 진짜 나쁜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라고 몰입한 순간을 떠올리는 그다.
“평소엔 집에 있는 걸 좋아해서 취미는 드라마와 영화 몰아보기예요. ‘신세계’처럼 남자답고 거친 장르부터 ‘스물’처럼 우정을 다룬 이야기도 재미있더라고요. 사실은 되게 차분한 성격이에요. 그러다가도 운동하는 걸 좋아해서 친구들과 헬스, 축구, 탁구, 볼링, 바이크 등을 하면서 얘기도 많이 하고 그래요.”
실제 자신의 모습까지 진솔하게 밝힌 장미관은 마지막으로 ‘도봉순’ 시청자들에게 심심한 사과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소름끼치도록 극악무도한 김장현 역으로서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첫 인상을 남긴 터라 그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순간이다.
“일단 가위 눌린 분들께는 죄송하고요.(웃음) 악역을 맡고서 좋은 시선, 나쁜 시선 모두 받아봤는데 그저 좋더라고요.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감독님, 작가님부터 보영 씨, 형식이, 지수까지 좋은 분들을 만났는데, 다음이 걱정될 정도로 운이 좋게 잘 돼서 감사하고 한편으론 부담스럽기도 해요. 스태프 분들에게 계속 말씀드리지만, 저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셨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좋은 모습 보여드릴 테니 잘 지켜봐주세요.”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