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미래정책연구회 연구위원으로 참석하고 있는 엄창섭 고려대 교수는 국내 대기업들이 ‘퍼스트무버’를 언급하는 데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선도적으로 나서서 기술개발을 하거나 혁신을 주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이 길을 닦아놓으면 따라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탓이다. 물론 기업 탓만은 아니다. 엄 교수는 “국내에서는 뭘 하나 하려고 해도 이것저것 규제가 많아 힘든 게 사실”이라며 “중국이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치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규제를 풀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기업도 문제지만 정부 역시 기업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기업들이 장기 전략을 세우지 못하는 이유가 ‘레퍼런스 도그마(reference-dogma)’에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무리 뛰어나고 혁신적인 기술을 내놓아도 국내나 해외에서 사례를 내놓지 않으면 곧바로 휴지통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기술발전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미래가 불확실해질수록 포트폴리오 차원에서라도 미래에 투자해야 하는데 언제나 레퍼런스부터 챙기고 있으니 혁신의 주도자가 될 리 없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아무리 대박이 나는 아이템이라고 하더라도 시장 침투율이 5% 정도는 돼야 겨우 발을 들여놓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혁신적인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아이디어를 내면 반드시 다른 어디서 추진하고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고 없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묵살됩니다. 그게 ‘퍼스트무버(first mover)’를 외치는 정부와 기업의 현실입니다.” 차원용 아스펙미래기술경영연구소장의 일침이 뼈저린 이유다.
이 같은 우려는 현실에 그대로 반영된다. 스마트 팩토리용 디지털 센서 시스템을 개발한 벤처기업 R사가 대표적인 사례. 이 업체는 유럽의 한 대형 유통업체로부터 관심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서둘러 중개해줄 곳을 찾았지만 국내에서는 나서는 곳이 없었다. 매출을 일으킨 적이 없고 해당 기술 역시 외국에서 사례를 찾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R사는 국내를 포기하고 일본에서 계약을 대행해줄 업체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R사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에 만연한 보신주의만 없었더라도 수천억원에 달할 매출액을 일본 기업에 빼앗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현식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 부소장은 이를 ‘패스트팔로어’의 관성이 국내 기업에 여전히 뿌리 깊은 탓으로 평가하고 있다. 최 부소장은 “제너럴모터스(GE)나 로열더치셸 등 글로벌 기업은 수십년 전부터 미래학자와 함께 미래를 대응하고 이를 위한 투자도 아끼지 않고 있다”고 전제하며 “하지만 국내 기업은 당장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서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기업들이 미래를 위한 적극적인 투자에 과감히 나설 것을 조언했다. 최 부소장은 “글로벌 기업이라면 시장을 만들고 통찰하는 시각이 필요하고 트렌드 조성이 아니라 없는 시장을 만드는 모험적 자세가 필요하다”며 “삼성과 같은 기업에 바라는 게 바로 이것”이라고 덧붙였다. /탐사기획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