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두 국가는 외국이 아니고 단지 특별한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지난 1969년 10월21일.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는 뜻밖의 취임연설로 참석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이래로 서독 정부가 고수해온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한 것이다. 진보정당인 사회민주당 소속의 브란트 총리가 취임하자마자 ‘동독과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와는 상대를 안 한다’는 기존 대동독 정책의 기조를 바꿔버렸으니 참석자들이 놀란 것도 당연했다. 이것이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된 ‘동방 정책(ostpolitik)’의 출발점이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82년.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연합(CDU) 출신의 헬무트 콜이 총리에 올랐다. 콜 총리는 취임연설에서 “지금까지 동독과 체결한 협정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진보정권의 동방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는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 통일은 이처럼 20년 이상 이어져 온 일관된 정책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시야를 한반도 쪽으로 옮겨보면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통일재원 마련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여기서 나온 것이 ‘통일 항아리’다. 민간 차원의 기금을 만들어뒀다가 통일이 되면 쓰자는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후 흐지부지돼 버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이 냉탕 온탕을 오간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추진된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이명박 정부에서 폐기 처분됐다.
국가 성장전략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저탄소 녹색성장을 제시했다.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와 연료전지·그린카 등의 산업을 키워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는 정권이 바뀌자 시들해져 버렸다. 그러는 사이 중국이 녹색산업을 키우면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전기차 생산국이 됐다. 중국은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 생산도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앞선 정부 정책의 색깔 지우기는 5년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 시절의 ‘벤처창업 지원정책’ 대신에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을 들고 나왔고 박근혜 정부는 녹색성장 대신에 ‘창조경제’를 내세웠다. 경제정책이 5년마다 리셋되면서 연속성이 사라진 것이다.
10일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국정운영을 위한 어젠다 선별작업이 한창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과정에서 탄생한 새 정부는 어떤 식이든 전 정권과는 차별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 가지 걱정이 되는 부분은 새 정부가 너무 차별화를 하려다 국가 이익까지 훼손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지금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국가 안보가 심하게 위협받는 시기다. 이를 자칫 잘못 다루면 국가의 생존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국력을 감안하면 좋든 싫든 우리의 안보는 미국과 동맹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만일 북한에 대한 제재와 대화의 병행을 기치로 내건 새 정부가 이전 정부와 차별화를 한다고 미국과 조율 없이 북한과 섣부른 대화에 나서는 것은 일을 꼬이게 만들 수 있다. 북한 핵을 폐기하지 못하면 우리의 궁극 목표인 통일도 어려워진다. 일자리 정책도 마찬가지다. 새 정부가 이전 정부와 다른 길을 가는 데만 신경을 쓰다가 정책의 단절이 발생한다면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응도 일자리 창출도 힘들어질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비록 탄핵정국 속에서 탄생했지만 정권의 운용은 기 싸움으로 할 일이 아니다. 모쪼록 새 정부가 앞으로 국정을 운용해나가는 과정에서 나라를 위한 좋은 정책은 어느 정권의 아이디어라도 과감하게 수용하는 용기를 내주기 바란다. 누구의 정책이든 결국 국민에게 도움이 되면 좋은 것 아닌가. /cso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