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가 18일(현지시간) 새로운 보험회계기준(IFRS17) 최종안을 확정 발표하면서 그간 숨죽이고 지켜만 보던 국내 보험 업계가 생존게임의 본궤도에 오르게 됐다. IFRS17은 보험부채를 원가가 아닌 시가로 평가하는데 단기 성과 위주로 고금리 저축성보험 판매를 통해 몸집 불리기에만 치중했던 국내 토종 보험사의 재무 건전성에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과 KDB생명, MG손해보험 등 국내 중소형 보험사들은 IFRS17 도입에 따라 재무건전성 악화에 몰렸다. 일부 보험사들은 대주주 증자요청과 지분정리, 부동산 매각 등 자구노력에 나서고 있지만, 대주주의 증자여력이 없는 보험사들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됐다.
국내 보험사들이 IFRS17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자산 규모=보험사 위상’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 채 지난해 초까지도 고금리 저축성 영업에 목을 매온 후진적인 경영행태를 답습해왔기 때문이다. IFRS17은 과거 계약분까지 모두 소급해 보험 계약자에게 돌려줘야 할 보험금을 모두 시가로 평가해 보험 부채로 잡도록 하고 있다. 당장 고액 계약을 많이 유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고금리 확정형 저축성보험을 쏟아냈던 보험사일수록 보험 부채가 더 커지고 새 회계 처리 방식에 따라 재무 건전성이 취약한 보험사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손보사에 비해 생보사, 신생사에 비해 오래된 보험사일수록 이 같은 위험에 크게 노출돼 있다. 이 때문에 삼성·한화·교보·흥국·KDB생명 등 업력이 긴 생보사일수록 과거 영업의 후유증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빅3 등 메이저 생보사들은 자본력을 일정 정도 확충해놓고 있지만 나머지는 재정건전성 악화로 이미 보험상품 판매중단 등의 경영위축을 맞고 있다.
국내 보험사들은 현시점에서 급격한 상품 구조 개선이 불가능해 후순위채·신종자본증권 발행을 통한 자본 확충, 구조조정·조직 축소 등 사업비 절감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실질적 대책이 아닌 미봉책이라는 지적이 많다. 후순위채에 손을 대는 보험사가 많지만 일부 보험사들은 자산운용 수익률(3~4%)보다 높은 5% 수준의 금리를 보장해야 발행이 가능해 이자 부담이 무겁다. 지점 통폐합과 인력 축소 등에 나서기도 하지만 이에 따른 영업력 손실은 불가피하다. 이 때문에 보험 업계에서는 사면초가에 놓인 보험사들 중 일부는 1990년대 말 일본 보험사들처럼 줄도산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금리 쇼크를 이겨내지 못한 보험사 여덟 곳이 파산하거나 통폐합됐다. 보험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금이라도 덩치에 연연하지 말고 수익을 못 내는 사업은 과감하게 접고 특정 보험만 파는 특화 보험사가 되거나 아예 오프라인 영업은 접어버리는 등 확실한 변화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며 “문을 닫는 보험사가 나온다면 결국 보험 업계 전체에 부담이 되고 계약자 피해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외자계 보험사는 여유로운 상황이다. 외자계 보험 업계의 한 관계자는 “본사에서 오래전부터 한국 보험사들의 고금리 영업 관행을 우려하면서 상품을 안 팔아도 좋으니 금리 경쟁에 뛰어들지 말라고 계속 경고했다”며 “이에 대해 당시에는 마케팅 부문에서 볼멘소리를 많이 했으나 지금 와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실제 외자계 또는 외자계 출신 보험사들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 지급여력(RBC)비율이 ING생명(319.2%), AIA생명(217.8%), 푸르덴셜생명(275.7%), PCA생명(352.4%), 라이나생명(316.0%), BNPP카디프생명(334.6%) 등 업계 상위권을 휩쓸었다. 심지어 이들은 대부분 새 회계기준이나 감독회계기준이 도입되면 재무 건전성 지표가 더 높아지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상품 판매는 물론 오랫동안 미국이나 유럽식 엄격한 회계 기준에 따라 재무관리·자산운용 등을 해온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