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이 재무건전성 지표인 지급여력(RBC) 비율이 금융당국의 권고치 기준 아래로 급락하면서 대주주 증자나 부동산 매각, 지분 정리 등의 자구노력이 필요하지만 오너인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대규모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 중인 상황에서 주요 결정이 미뤄지다 보니 경영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구나 RBC 비율을 높이기 위해 일선 지점 등을 40% 이상 축소하는 등 자구노력에 나섰지만 노조와 전속설계사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내부 비판이 커지면서 최악의 경영위기에 직면했다는 분석이다.
29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최근 RBC 비율이 150% 아래로 떨어지면서 근본적인 자본 확충이 시급해졌지만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주주 유상증자는 물론 부동산 매각, 흥국화재 지분 정리 등 ‘비상대책’을 빠르게 가동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오너 부재를 이유로 ‘올스톱’됐다. 이번에도 결국 근본적 대책보다 구조조정으로 절감한 사업비로 RBC 비율을 간신히 끌어올려 150%선을 맞출 것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보험업계의 한 관계자는 “보험사 체질 개선을 위해 구조조정은 필요한 작업이지만 상품·영업전략 등 큰 그림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흥국생명은 대주주가 재판을 받고 있어 전면에 나설 수 없다는 이유로 전문경영인을 앞세워 미봉책에 불과한 구조조정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갑작스러운 구조조정 소식은 이미 회사 내부를 흔들고 있다. 지난 12일 흥국생명이 ‘경영 개선을 위한 지점 효율화 전략’이라는 명목으로 전국 각지의 지점과 금융플라자를 통폐합하는 계획을 발표한 후 지점장들은 물론 현장직원과 설계사들까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험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 지방의 흥국생명 소속 지점장들은 전날까지 평소처럼 일하다가 날벼락처럼 지점이 없어진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며 “사업가형 지점장에 대한 적법한 계약해지라고는 하나 당사자들의 충격이 커 보였다”고 말했다. 사측의 예상치 못한 발표에 흥국생명 노조가 곧바로 권고사직은 물론 인위적인 구조조정 등도 없어야 한다고 방어에 나섰지만 결국 ‘자의’를 가장한 퇴사가 속출할 것이라는 게 내부 직원들의 절망적인 관측이다.
구조 조정으로 내홍이 깊어지는 가운데 외부에서는 은행들의 흥국생명 상품 취급 일시중단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KDB생명이나 MG손보 등도 은행들로부터 비슷한 조치를 당했지만 방카 중단에 따른 충격은 흥국생명이 가장 크다. 흥국생명은 2003년 이후 방카슈랑스 영업 업계 1위를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은행 채널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흥국생명 안팎에서는 이 전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가 장기 경영 비전도 없이 단순히 내부 일감 몰아주기로 배당이익이나 챙기는 ‘원오브뎀’ 계열사 정도로 취급해온 데 대한 부메랑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보험업에 대한 오너 일가의 무책임한 태도와 안일한 인식이 흥국생명을 오늘의 위기로 내몰았다는 지적이다. 흥국생명의 한 직원은 “늘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면 경영진을 갈아치우거나 직원과 설계사를 자르는 식으로 전문경영인과 직원들에게만 고통을 종용해왔다”며 “오너가 책임을 지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