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포카혼타스의 사랑과 진실



굶주린 영국인 정착민들에게 몰래 식량을 날라준 천사. 추장인 아버지에게 호소해 존 스미스를 처형 위기에서 구해낸 은인.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국인 정착민 간 전쟁을 막은 평화의 수호자. 몸을 던져 총 맞을 원주민 추장을 구한 존 스미스와의 사랑과 이별…. 미국 월트 디즈니사의 33번째 애니메이션으로 1995년 개봉된 ‘포카혼타스(Pocahontas)’의 내용이다. 영화에 그려진 대로 영특하고 아름다운 원주민 소녀 포카혼타스의 사랑 이야기는 진실일까? 그렇지 않다.


진실과 허구가 섞여 있다. 영화 ‘포카혼타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실존했던 사람들이지만 내용은 각색이나 창작이 많다. 포카혼타스가 영국인 남자와 결혼했으나 대상은 존 스미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원주민 처녀와 영국인 신랑은 결혼 후 애를 낳고 영국까지 방문했어도 첫 만남이 ‘사랑’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다. 영국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을 겁박하기 위해 포카혼타스를 인질로 납치하면서 인연이 맺어져 결혼까지 이르렀다. 포카혼타스 이야기에는 ‘영국인의 폭력’이 깔려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허구인지 따지기 위해 객관적인 기록을 보자. 확실한 사료가 몇 개 있다. 포카혼타스의 영국 도착 일과 사망 날짜. 영국 정착민 담배업자 존 롤프와 결혼해 아들 토마스 롤프를 낳은 포카혼타스는 제임스타운을 떠나 1615년 6월 12일 포와탄족 10명과 함께 영국 플리머스 항구에 내렸다. 영국에서 ‘인디언 공주’로 불렸던 포카혼타스는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도 만났다. 런던에 9개월 머물렀던 포카혼타스는 제임스타운으로 돌아가던 도중 영국에서 죽었다. 사인은 천연두.

소설과 영화의 소재로 수없이 활용된 포카혼타스 스토리를 보자면 의문이 하나 나온다. 미국인들이 ‘건국의 시조’로 여기는 ‘메이 플라워’호가 매사추세츠에 도착한 게 1620년 말. 제임스타운은 이보다 13년 반 앞선다. 1586년 남녀노소 107명을 내려놓고 2년 뒤 다시 찾았으나 아무도 남지 않아 ‘잃어버린 식민지’라는 이름을 얻은 ‘로어노크 정착촌(Roanoke Colony)’은 논외로 치자. 그렇더라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 건설이 메이플라워호 도착보다 훨씬 빠른데도 ‘건국의 시조’는 왜 메이 플라워 호로 간주할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미국 형성기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땅을 밟은 청교도들의 목소리가 컸다. 두 번째로 북부의 입김이 더 셌다.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의 포카혼타스 얘기가 퍼지기 시작한 것도 남부와 북부의 대립이 심해지던 1830년대 후반 이후부터다. 매사추세츠 뉴 폴리머스에서 시작한 북부에 맞서며 남부인들은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의 정통성을 부각 시키기 위해 포카혼타스 전승을 써먹기 시작한 것이다. 디즈니의 영화에서 포카혼타스의 연인으로 나오는 영국인 청년 존 스미스가 남긴 여행기 몇 편이 남부 작가들을 자극해 수많은 작품으로 쏟아졌다.

포카혼타스는 과연 존 스미스의 생명을 구했을까. 디즈니사의 영화에서는 존 스미스가 처형 당하기 직전 포카혼타스가 울면서 아버지에게 매달려 생명을 구해낸다. 실존 인물인 존 스미스도 여행기에서 그렇게 썼다. 정말 그럴까. 최재인 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의 연구 논문(포카혼타스 이야기를 통해서 본 인종과 젠더)에 따르면 존 스미스의 여행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제임스타운에서 돌아온 스미스는 1608년과 1612년에 발간한 버지니아 관련 여행기에는 포카혼타스를 ‘재치가 뛰어난 10살 정도 소녀’라고 소개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구출한 얘기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존 스미스가 포카혼타스와의 사랑 얘기가 포함된 여행기를 발간한 시기는 1624년. 영국을 방문(1615년)하고 귀환 도중 사망(1616년)해 유명 인사가 된 이후다. 둘이 연인 관계였다는 스미스의 주장 자체도 믿기 어렵다. 첫 만남이 이뤄졌다는 1607년, 포카혼타스의 나이는 12세. 존 스미스는 27세였다. 더욱이 선원으로 세계 곳곳을 다녔던 스미스가 제임스타운에 오기 전에 썼던 여행기에는 러시아와 터키에서도 신분이 높은 여성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기는 대목이 나온다. 요컨대 스미스가 ‘책을 팔고 싶은 마음’에 여행기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포카혼타스 이야기가 유명해질수록 가려진 것도 있다. 14살 무렵에 ‘코쿰(Kocoum)’이라는 이름의 원주민 청년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에 따르면 포카혼타스가 영국 정착민과 결혼하기 이전에 이미 유부녀였다는 기록을 미국인들은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디즈니의 영화에서 코쿰은 포카혼타스를 짝사랑하는 역으로 등장한다. 포카혼타스는 백인 남성의 정복욕을 충족시키는 대상이자, 영국인에게 귀속될 운명의 처녀지 아메리카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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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에서 존 스미스가 제임스타운의 초기 지도자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는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며 영국 정착민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돈을 벌지 못한 채 제임스타운이 불탄 1609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제임스타운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은 존 롤프(John Rolfe). 23살 청년 롤프가 자메이카산 담배를 이식해 부를 쌓는 동안 제임스타운에는 포카혼타스(18살)가 포로로 잡혀 왔다. 원주민들과 사이가 틀어져 전쟁을 벌이던 정착민들에게 납치된 것이다.

정착민들은 포카혼타스를 돌려받으려면 ‘원주민들에게 끌려간 정착민들을 석방하고 빼앗아 간 무기를 돌려달라’는 조건을 내걸었으나 포와탄족은 듣지 않았다. ‘정착민 포로들이 죽거나 도망쳐 요구하는 숫자가 안된다’며 무기도 망가트린 채 반환했을 뿐이다. 식량을 딸려 보냈지만 영국 정착민들은 만족하지 않고 포카혼타스를 계속 붙잡았다. 포카혼타스는 추장인 아버지에게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가 낡은 칼과 도끼 따위의 쇠붙이를 나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냐’며 불만을 토했던 그는 빠르게 변해갔다.

영어를 익히고 기독교로 개종해 세례를 받으며 ‘레베카(Rebecca·성서에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영어식 이름)’라는 새 이름도 얻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도 있었다. 포로로 잡힌 지 1년 1개월 만에 담배를 기르는 정착민 롤프와 결혼한 것이다. 영국인 부인과 사별했던 롤프는 24세, 포카혼타스는 19세였다. 둘은 이듬해 아들 토마스를 낳았다. ‘레베카 부인’이 된 포카혼타스는 백일을 갓 지난 아들과 함께 영국으로 향하는 뱃길에 올랐다. 무리한 여행이었으나 무사히 도착한 롤프 가족은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포카혼타스가 살았던 포와탄족은 ‘공주’라는 개념이 없었어도 그는 영국인들에게 ‘아메리카의 공주’처럼 대우받았다. 좋은 옷을 입고 극장의 상석에 앉았다.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를 정식 알현한 것은 아니지만 극장에서 만나 인사한 적도 있다. 영국이 포카혼타스와 핏덩이 아들을 데려와 극진하게 대접한 데는 이유가 있다. 투자자와 개척민 모집. 제임스타운을 개척하려는 버지니아회사에게 포카혼타스의 존재는 더없는 홍보 수단이었다. 롤프 같이 평범한 개척민도 사업가로 성공하고 원주민 공주를 개종시켜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점은 영국인들에게 신대륙 개척이 종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익하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포카혼타스는 영국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식민지 개척의 홍보대사로 떠올랐으니 제임스타운에 돌아가는 게 수순이었으나 귀환 길에 오르자마자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아들은 건강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남기고 숨진 포카혼타스는 나이는 불과 22세. 영국인을 처음 만난 지 10년 만에 이국 땅에서 숨졌다. 만약 그가 영국 정착민들과 만나지 않고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요절했어도 포카혼타스는 행복했을까. 모를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포카혼타스의 동족인 포와탄족은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는 점이다. 백인들이 만족할 때까지 쫓기고 빼앗겼다.

포카혼타스의 얘기는 남은 게 하나 더 있다. 그의 아들 토마스 롤프. 어른들도 견디기 힘들다는 대서양을 왕복하면서도 용케 살아남은 토마스는 65세까지 살며 외동딸 제인을 남겼다. 제인은 부유한 사업가 로버트 볼링과 결혼해 버지니아의 정치가 존 볼링을 낳고, 그 자손이 퍼졌다고 한다. 버지니아에서는 남북전쟁 이전까지 포카혼타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가문들이 많았다. 요즘에도 포카혼타스의 피가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호사가들이 있다. 근거가 희박한데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부인 에디스 볼링 윌슨과 영화배우 글랜 스트레인지, 심지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까지 포카혼타스의 피가 섞였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온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포카혼타스의 이야기는 계속 모습을 바꿔간다. 포카혼타스가 죽기 1년 전 제작된 초상화에는 분명하게 나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얼굴이 시간이 흐를수록 백인의 얼굴로 변해가는 것처럼. 400년 넘은 포카혼타스 스토리 가운데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담배. 미국의 경제사가 존 스틸 고든의 역저 ‘부의 제국’에 따르면 존 롤프가 서인도제도에서 가져온 담배 종자는 버지니아의 무덥고 습한 기후에서 잘 자랐다. 고든은 롤프가 포카혼타스 일족의 도움을 받아 담배를 재배하고 건조하는 어려운 과정을 익혔다고 봤다. 포카혼타스 사망 직후 9t이었던 버지니아산 담배의 영국 출하량은 10년 뒤 22만t, 20년 뒤 136만t으로 늘어났다. 버지니아는 오늘날에도 미국 담배산업의 중심이다. 미국이 기를 쓰고 수출하려는 담배는 미국의 첫 산업이었다. 포카혼타스가 베푼 호의가 미국 경제의 자양분으로 작용한 셈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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