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연미복 차림의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공간을 가득 메우는 박수 소리와 함께 제주아트센터 대극장 무대에 등장했다. 스타인풰이 피아노 앞에 앉은 그가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제5번을 연주한다. 기도하듯 건반을 어루만지다가도 경쾌한 손놀림으로 화성의 향연을 펼쳤다. 여기까지는 평소 그의 연주회와 다를 바 없다.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청중들의 반응이다. 4악장 막바지 한 남학생이 무대로 달려나가 백건우의 오른편에서 함께 건반을 두드렸고 객석 곳곳에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거나 만세를 부르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11일 제주아트센터에서의 ‘지적장애인과 함께 하는 백건우의 음악여행’은 이처럼 아주 특별했다.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12~15일 제주에서 개최하는 ‘제10회 제주 해비치 아트 페스티벌’의 사전 공연으로 기획된 이번 특별음악회는 백건우의 제안으로 약 400명의 지적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위해 마련됐다.
이날 연주회에서 그는 프랑스 모음곡 외에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0번 G 장조, 리스트의 바흐 이름에 따른 판타지와 푸가를 연주했고 앙코르곡으로 연주한 리스트의 잊혀진 왈츠 4번까지 밝고 부드러운 곡 위주로 선보였다. 연주회를 마치고 취재진과 만난 백 씨는 “음악인으로서 연주회를 연다는 것은 음악으로 서로 마음을 나눈다는 의미”라며 “지적장애인들과 음악으로 대화하고 싶고 만나서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달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연주회를 제안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백건우는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청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간다. 2011년과 2013년에는 국내 섬마을을 찾아 지역 주민들을 위해 음악회를 여는 ‘섬마을 콘서트’ 투어로 화제를 모았고 2014년 7월에는 제주도 제주항 특설무대에서 세월호 사고 100일 추모공연을 열었다.
이날 공연에 앞서 공연장 스태프들은 무대 위에 올려져 있던 피아노를 객석 앞줄에서 2미터 남짓 떨어진 오케스트라 피트로 옮겼다. 평소와 달리 객석 조명도 밝게 했다. 백 씨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연주하고 싶어 주최 측에 제안했다”며 “보통 음악회는 무대와 객석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분리되지만 이 공연만큼은 안방처럼 편안하게 느끼길 바랐다”고 말했다.
공연 중간중간 들려오는 소리나 무대로 달려 나온 학생을 보고도 백건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연주회가 아니었다면 함께 건반을 두드리며 놀아줄 수 있었겠지만 다른 청중들을 위해 멈출 수 없었다”며 “오히려 더 많은 돌발상황을 예상했었기 때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매끄럽게 연주회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앞으로도 장애인을 비롯한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연주 기회가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 백 씨의 바람이다. 그는 “해외 공연장에는 별도 공간을 마련해 몸이 불편한 사람도 편안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한다”며 “국내 공연장들도 이 같은 시설을 고민해보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제주=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