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미국은 헌법을 몇 번 개정했을까. 한 번도 개정하지 않았다. 독립선언 11년 뒤인 1787년 제정된 헌법의 골격을 230년간 유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어떨까. 제헌국회의 1948년 헌법 제정 이후 9차례 헌법을 고쳤다. 그렇다면 미국 헌법은 무오류이며 완벽한가. 그렇지 않다. 27차례 수정 절차를 밟았다. 필요에 의해 고칠 게 있으면 헌법의 해당 조항을 고치는 게 아니라 헌법 조문 끝에 수정조항(Amendment)을 덧붙여왔다. 제정 헌법과 수정 헌법의 조문이 상충할 경우 후자가 우선이다.
두 번째 질문. 미국의 부통령은 어떤 자리일까. 정답은 없다. 판단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부통령 출신들은 스스로 위상을 혹평하는 경우가 많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토마스 마셜이 이런 농담을 자주 들먹였다. ‘형은 어부가 되어 바다로 나갔다. 정치에 입문한 동생은 부통령이 됐다. 그 후 아무도 그 형제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린드 존슨 대통령 시절 허버트 험프리 부통령은 ‘눈보라 속에서 헐벗고 떨어도 아무도 성냥불 하나 주지 않는 자리가 부통령’이라고 말했다.
정말 부통령 자리는 한직일까. 그렇지 않다. 갈수록 중요도가 높아지는 추세다. 평시에는 상원의장으로 사회권을 갖는 정도지만 대통령 직을 승계 받을 수도 있다. 선거를 거치지 않고도 대통령직에 오른 제럴드 포드의 사례는 유사시 부통령 자리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73년 12월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뇌물사건에 휘말려 사임한 스피그 애그뉴 부통령 후임에 제럴드 포드 하원의원을 지명했다. 8개월 뒤,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파장을 못 이겨 사임하자 포드는 대통령직까지 물려받았다. 사상 처음으로 선거 없이 대통령이 된 포드는 넬슨 록펠러를 부통령으로 지목했다. 이후 2년 반 동안 미국은 선거를 치르지 않은 정·부통령 시대를 보냈다.
질문 1과 질문 2에는 공통분모가 담겨 있다.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자리. 미국 연방 헌법 제2조의 정·부통령 관련 조항은 수정헌법 제12조와 내용이 다르다. 앞서 말한 대로 나중에 제정한 수정헌법 12조가 우선이다. 후자의 골자는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자의 투표용지 구분. 이전까지는, 즉 연방헌법 제2조의 적용을 받을 때는 표를 가장 많이 받으면 대통령, 2위 득표자는 부통령이 되는 구조였다. 연방 헌법에 이런 규정이 마련된 이유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정당의 존재를 불신했기 때문. 파당은 분열을 낳는다고 우려했다. 독립 전쟁 직후에는 딱히 정당도 없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며 정치 환경이 변했다는 점. 물론 초기에는 제도의 허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대륙회의가 1789년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에, 존 애덤스를 부통령에 각각 추대했을 때만 해도 부작용이 없었다. 1792년 두 사람을 재추대할 때도 마찬가지. 하지만 얼마 안 지나 좋지 않은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록 선거인단을 뽑는 간접선거였으나 국민들이 최초로 대선에 참가한 1796년 대선에서 골치 아픈 결과가 나타났다. 1위를 차지한 존 애덤스는 대통령에 오르고, 2위인 제퍼슨은 부통령에 올랐으나 서로 당적이 달랐다.
애덤스 대통령의 소속 정당은 ‘연방파(Federalis)’, 제퍼슨은 민주공화파(Democratic-Republican) 소속이었다. ‘미국에서는 정당이 출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비웃듯 연방파와 민주공화파는 뚜렷한 입장 차이를 보이며 서로 증오심을 키웠다. 정당으로 발전해나간 두 당파는 지향점도 분명히 달랐다. 보호 무역을 주장하는 연방당은 북부와 제조업자들이 지지 기반이었던 반면 민주공화당은 남부의 대지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결정적으로 두 당파가 선호하는 경제 정책의 차이가 컸다. 연방당은 보호무역을 민주공화당은 자유무역을 원했다. 연방당은 중앙 정부의 권한 강화를 꾀한 반면 민주공화파는 연방보다 13개 주의 주권이 우선이라고 여겼다.
더욱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양당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네거티브 전략에 따른 상대방에 대한 중상 모략이 판치고 금권이 동원되는 혼탁한 선거로 골이 깊어진 것이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정당의 대통령과 부통령은 툭하면 적의를 드러냈다. 자연스레 대통령과 부통령이 같은 정당에서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반목하던 대통령과 부통령은 1800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었다. 결과는 제퍼슨 부통령의 승리. 일반투표에서 61.4%를 득표해 38.6%에 머문 현직 대통령 존 애덤스를 크게 앞섰다. 선거인단 표도 73표를 확보해 65표의 존 애덤스를 확실하게 눌렀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사달이 났다. 민주공화당이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로 각각 내세운 제퍼슨과 아론 버의 득표수가 똑같은 73표로 나왔기 때문이다. 선거인 몇 명이 착오로 잘못 투표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 충격과 논란 끝에 미합중국의 대통령을 뽑는 결정권은 연방헌법 2조에 따라 하원으로 넘어갔다. 실수로 빚어진 비정상 환경에서 아론 버는 욕심을 냈다. 당시 44세의 야심가였던 버는 단숨에 대통령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사력을 다해 뛰었다. 하원 투표의 열쇠는 대선에서 패배한 연방당이 갖고 있었다.
연방당은 1800년 4월부터 시작된 하원의원 선거(1801년 “8월까지 만 15개월 넘게 진행됐다)에서 줄줄이 패했으나 아직 다수당의 위치를 갖고 있었다. 선거인 수에서 동률을 이룬 재퍼슨과 버가 하원에서 얻어야 하는 표는 최소 9표. 첫 투표의 결과는 무효로 나왔다. 제퍼슨 8표에 버 6표, 기권 2표로 과반 미달. 무려 35차 투표에 이르기까지 같은 결과가 나왔다. 피를 말리는 양측의 싸움은 36차 투표까지 이어졌다. 캐스팅 보트를 쥔 연방당도 내부 입장이 정리되지 않아, 존 애덤스 전 대통령은 버를 밀고 해밀턴은 재퍼슨을 뒤에서 도왔다. 결국 재퍼슨은 미국 3대 대통령에 올랐다.
워싱턴 대통령 밑에서 각각 국무장관과 재무장관으로 재임할 당시부터 숙적이었던 재퍼슨과 해밀턴은 손잡고 버의 야망을 꺾었지만 후폭풍이 찾아왔다. 재퍼슨은 우선 제도부터 손봤다. 마침 1800년 이후 치러진 하원 선거에서도 연거푸 대승을 거둬 정책 추진력이 배가된 상태였다. 1803년 12월 하원에서 수정헌법 12조를 발의, 하원에서 찬성 83표로 반대 42표를 누르고 상원도 22표 대 10표로 통과했다. 수정헌법이 통과되려면 9개 주 이상의 동의가 필요했던 상황. 1814년 6월 15일 뉴햄프셔 의회가 비준하며 수정헌법 12조는 효력을 얻었다. 미국의 정·부통령 러닝메이트 제도가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
정파 싸움과 개인적 야심으로 점철된 1800년의 대통령 선거는 제도 보완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대선 과정에서 얽히고 설킨 사람들은 비참한 최후를 맡거나 어부지리를 얻었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초대 국무장관을 지냈다는 화려한 이력에도 상대적으로 어렵게 대통령직에 오른 제퍼슨은 이를 갈았다. 다득표자가 대통령, 2위 득표자는 부통령이 되는 연방헌법 2조에 따라 부통령에 취임한 버를 노골적으로 따돌렸다. 분패한 버는 부통령직을 받아들이면서도 복수의 칼날을 세웠다.
대상은 알렉산더 해밀턴 전 재무장관. 자신의 패인을 해밀턴과 제퍼슨의 야합 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해밀턴이 제퍼슨을 택한 데에는 버와 오랜 악연이 작용했다. 해밀턴과 버는 한 살 차이의 동년배이자 독립전쟁에서 워싱턴 사령관의 부관을 지으며 변호사 출신이라는 공통점에도 애초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 해밀턴은 서인도제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지내다 고학으로 주류계급에 합류한 반면 버는 친아버지와 외 할아버지가 대학 총장까지 지낸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해밀턴과 버는 최소한 3번 크게 맞붙었다. 해밀턴의 부유한 장인이 1791년 버에게 밀려 연방 상원 의원 선거에 패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상했다. 버의 상수도 회사로 위장한 금융회사 설립을 해밀턴은 재무장관인 자신을 농락했다고 여겼다. 버는 바대로 1800년 대선에서 ‘해밀턴 때문에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며 앙심을 품었다. 버의 부통령 임기가 끝나가던 1804년에는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해밀턴에 막혀 실패하고 말았다. 버의 증오심은 1804년 여름 양자 간 권총 결투로 이어져 해밀턴은 결투 사흘 후 죽었다. 버는 이후로도 22년을 더 살아 80세 천수를 누렸으나 말년을 반역자, 도망자라는 오명 속에 쓸쓸히 보냈다.
대선과 수정헌법 12조를 둘러싼 싸움은 다음 세대에도 그치지 않았다. 제퍼슨에게 패했던 애덤스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상원 의원 시절 12차 수정헌법에 가장 반대했던 존 퀸시 애덤스는 이 법 덕분에 1825년 대통령에 올랐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2위에 그쳤으나 과반 미달로 인한 재선거에서 4위 득표자의 도움으로 대통령에 올랐다. 자신의 뜻대로 법이 바뀌지 않았다면 부통령에 머물렀을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득표 1위였음에도 눈앞에서 대통령직을 놓친 잭슨은 다음 선거에서 대승을 거둬 백악관에 입성한 뒤 기득권 계층을 배제하는 정책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대권을 향한 꿈과 정쟁, 당국의 눈을 속여 돈을 벌려는 꼼수, 음모와 결투, 죽음이란 속으로 채워진 미국의 선거 제도 변천사가 먼 나라의 옛날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살아 있는 한, 정·부통령 러닝메이트 제도를 포함한 정치 구조의 변화 노력과 헌법 개정 논의가 머지않았으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