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속도전’이 가히 놀랍다.
인천공항공사를 필두로 한 공공 부문 비정규직 ‘제로’ 선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민간에의 파급력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너도나도 허겁지겁 비정규직 사용실태를 점검하느라 분주하다. 따지고 보면 진작 했어야 했던 일들이다. 그동안 얼마나 안이하게 대처해왔던가 반성하게 된다. 뜬금없어 보이기까지 했던 최저임금 1만원도 기정 사실화되고 있는 분위기다. 근로시간 단축과 노동권 보장 질서 개편도 임박했다.
급기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공기관 성과연봉제도 폐지 수순에 들어갔다. ‘쉬운 해고’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양대지침은 이미 폐기된 상태나 다름없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노동정책의 고약한 속성 때문이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노동정책은 결코 지속 가능할 수 없다. 노사정의 합의가 필수다.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상호 공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박근혜표 노동정책의 수명이 그리 짧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재인 정부의 역할이 박근혜표 노동정책의 폐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변화된 산업환경에 부합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노동정책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성과연봉제 폐지도 그렇다. 옛날식 연공급제로 되돌아가자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노사로 하여금 새로운 직무형 임금체계 구축에 스스로 나서도록 만들어야 한다. 최저임금도 마찬가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만원이어야 한다는 식은 곤란하다. 영세자영업자들도 공감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진짜 게임은 지금부터다.
문재인 정부의 강점은 ‘복기’에 있다. 지금과 같은 속도전도 실은 참여정부 시절 국정경험과 대통령 재수생으로서 많은 고민 덕분일 것이다. 이쯤에서 문재인 정부가 사회적 대타협에 과감히 나설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부가 혼자 나서서 노동개혁에 성공한 예는 없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지 않고 노사정 대타협에 성공한 예도 또한 없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결국 본질적인 해법은 사회적 대타협뿐이다.
사회적 신뢰자산이 고갈되다 못해 말라버린 우리의 현실이 한탄스럽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최근 민주노총이 일자리위원회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최저임금위원회에도 복귀했다. 노동계가 정부의 진정성에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반가운 일이다. 이참에 잔뜩 주눅이 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영계도 다독여야 한다. 지금은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절호의 시점이다.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우선 노사정 모두가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편견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각자 계산기 두드려가면서 공격하고 방어하는 식의 ‘교섭’도 곤란하다. 자신의 고충을 솔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공감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무엇이 내게 ‘유리한가’가 아니라 무엇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사회적 대화는 그래야만 한다. 때마침 양대 노총이 공공 부문 성과급을 환수해서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청년 고용 확대 등에 사용하겠다고 한다. 무려 1,6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자신의 이익만 고집하지 않겠다는 노동계의 의지가 분명히 드러난 셈이다.
지난 1980년대 초 네덜란드의 실업률은 12%를 넘겼다. 청년실업률도 30% 정도였다. 과도한 복지지출로 정부 곳간도 비어갔다. 물가는 올랐고 노조는 또다시 10%가 넘는 임금인상을 요구했었다.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었고 기업은 채용 여력을 상실했다. 실업률은 또다시 치솟았다. 그랬던 네덜란드가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1982년 바세나르 협약 덕분이었다. 노조는 임금을 동결했고 사측은 일자리를 만들었으며 정부의 세밀한 재정지원을 했다.
문재인 정부가 그저 노동계를 위해 애쓴 정부로만 기억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회적 신뢰자산을 튼튼하게 쌓아올린 정부로 기억됐으면 한다. 부디 사회적 대타협으로 노사관계의 체질을 바꾼 정부로 두고두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