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전함 포템킨의 실제와 허구



1905년 6월 27일 아침 흑해의 무인도 텐드라섬 인근 해상, 러시아 제국 전함 포템킨호. 수병들이 술렁거렸다. 지난밤 100t급 어뢰정 N267 정에서 공급받은 쇠고기가 상했기 때문이다. 흑해 함대의 하계 기동훈련이 시작되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 먹을 쇠고기에서 악취가 나고 구더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몰려든 수병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런 건 돼지도 못 먹어’, ‘더러운 고깃덩어리를 바다에 던져버리자’, ‘일본군들도 이런 썩은 고기로 만든 음식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을 거다’.


수병들의 불만을 보고받은 고리꼬프 함장은 군의관에게 쇠고기의 상태를 검사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갑판 위의 쇠고기 덩어리를 대충 검사한 수석 군의관은 웅성거리는 수병들에게 짧게 말했다. “좋은 고기다. 아무 문제 없어. 식초로 씻어내기만 하면 충분하다.” 함장은 군의관의 판단으로 사태가 진정됐다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수병 전체가 들썩였다. 포템킨호의 일부 장교들은 위험하다고 느꼈다.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의 기운*이 퍼지던 상황. 더욱이 해군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일본과 전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수병들은 불만과 절망에 쌓여 있었다.

수병들은 점심 메뉴로 나온 쇠고기 수프에 손도 안 대고 빵만 먹었다. 수병들은 불만을 표출하며 웅성거렸다. 위험하다는 보고를 받은 함장은 수병 670여 명 전원을 함미 갑판에 불러 모았다. “제군들은 군의관이 이상이 없다는 데도 고기 수프를 먹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다. 당장 고기 시료를 채취해 병에 담아 전문가에 보내겠다. 그리고 모든 사태를 총사령관님에게 보고할 것이다. 총사령관님이 제군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할 것이다.” 연설을 마친 함장이 해산 명령을 내리고 수병들이 흩어지려던 순간, 부함장 길리아롭스키 중령이 나섰다.

함장의 온건한 대응은 수병들의 반항만 키울 것이라고 생각한 부함장은 명령을 내렸다. “잠깐. 전원 재정렬하라. 갑판장은 위병을 부르고, 방수포를 준비하라.” 수병들은 더욱 웅성거렸다. ‘위병(함내 헌병)과 방수포’란 처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위병들이 총살형을 집행하고 피에 젖을 수 있는 갑판을 보호하기 위해 방수포를 씌운다는 소식에 수병들은 더욱 흥분했다. 부함장은 수병들을 체벌할 수는 있어도 처형할 권리는 없었지만 협박하면 소요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여겼다.

부함장이 골라낸 수병 12명을 처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때 수병들도 대응하기 시작했다. 위병들에게 동료들을 죽이지 말라고 종용하는 한편으로 무기고를 열었다. 수병들은 사회주의당 비밀당원 몇몇의 보이지 않는 지도 아래 빠르게 무장을 갖췄다. 가장 먼저 총을 들고 나온 병사가 부함장이 쏜 소총에 맞아 쓰러지자 상황은 바로 뒤집혔다. 부함장은 수병들이 발사한 총탄에 바로 숨졌다. 수병들은 함내를 샅샅이 훑었다. 장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장교 26명 가운데 불과 몇 명만 헤엄쳐 도망가고 함장을 포함해 8명이 흥분한 수병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선상 반란이 일어나고 불과 30분 만에 전함 포템킨은 수병들의 손에 들어왔다.


수병들은 25인 평의회를 조직하고 뱃머리를 오데사 항구로 돌렸다. 밤 11시 무렵, 제국 해군기를 떼어내고 붉은 깃발을 단 포템킨호가 오데사 항구로 들어왔다. 입항 목적은 죽은 동료의 장례식과 물자 보급. 포템킨호는 오데사 시민들의 열띤 환영을 받았다. 구원군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인구 40만으로 러시아에서 4번째 큰 도시이던 오데사는 힘들게 차르에게 맞서고 있었다. 전체 인구의 4분의 3인 30만 명이 차르에게 저항했지만 군과 경찰, 코사크 기병대와 대치 중인 상황. 배수량 1만 2,900t으로 러시아 해군 최신예 전함, 한 시간에 포탄 50t을 발사할 수 있는 전함 포템킨이 큰 힘이 되리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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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 시민들의 기대는 현실로 나타났을까.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초반 기세는 거셌다. 흑해함대의 다른 전함에 승선한 수병의 일부는 포템킨호와 전투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에 합류했다. 포템킨호의 수병 평의회는 오데사 항구를 포위한 차르의 군대 장군들에게 시내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함포 사격을 가하겠다는 으름장도 놓았다. 한참 기세를 올리고 시민들의 기대도 높아졌을 때, 포템킨호는 차르의 진압군 사령부를 향해 함포를 쏘았다. 그러나 어렵게 발사한 함포는 목표를 빗나가 애꿎은 시민들의 주택만 부쉈다. 우군으로 합류하던 다른 전함도 좌초하자 수병들은 배를 몰고 6월 말 루마니아로 도망쳤다.

여기까지가 러시아 해군 전함 포템킨호의 실제 스토리. 후일담은 보다 비극에 가깝다, 포템킨호의 반란 주모자들은 러시아로부터 사면을 약속받고 귀국했으나 처형당했다. 포템킨호도 1차 대전에서 독일군에 나포됐다 영국군에게 넘어가고 엔진이 뜯긴 채 러시아로 반환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23년 고철로 분해 처리됐다. ‘근대화한 해군이 최신 무기를 갖고 일으킨 최초의 반란’이라는 포템킨호의 반란은 그 자체로는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세인들의 머릿속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1925년 제작된 영화 ‘전함 포템킨’ 때문이다. 당시 27세였던 세르게이 에이젠쉬테인이 감독한 이 영화는 그 촬영기법과 영상미로 전함 포템킨을 역사적 사실 이상의 실화처럼 만들었다.



소련 당국이 1925년 ‘러시아 1차 혁명(1905년)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이 영화의 줄거리는 사실과 다르다. 영화에서는 오데사 시민들과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이 힘을 합쳐 차르의 군대를 물리치지만 실제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소련의 선전 영화뿐 아니라 서구권 영화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연극처럼 5장으로 구성된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제4막 오데사의 계단. 젊은 여인이 진압군의 총을 맞아 쓰러지고 유모차가 계단 아래로 구르는 장면은 수많은 영화에서 패러디됐다.

오데사 계단의 장면은 특히 몽타주(montage) 기법의 백미로 손꼽힌다. 총을 쏘는 군인의 얼굴은 나오지 않지만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등장한다. 반면 공포에 휩싸인 군중은 흩어져 도망간다. 어머니의 피격과 계단을 구르는 유모차…. 치켜든 칼과 깨진 안경, 피 흘리는 여인의 얼굴 등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장면들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낸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몽타주’기법은 현대 영화의 새 지평을 개척한 예술적 성과로 평가된다.

전함 포템킨의 봉기는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영국의 소설가 겸 해양사 탐구자인 리처드 휴의 저서 ‘전함 포템킨’에 따르면 ‘러시아 함대의 수병은 최하층 농노 출신이었으며 사관들은 귀족 출신이었다. 러시아 함대는 말 그대로 러시아 사회의 모순이 응축된 곳에 다름이 아니었다.’ ‘포템킨’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에서 좋지 못한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남편을 폐위시키는 궁정 쿠데타로 집권한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가 배를 타고 지방을 시찰할 때 그레고리 포템킨은 가난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영화 세트 같은 마을을 급조해 여제가 다니는 곳마다 설치하고 뜯고를 반복했다.



여기서 전시행정을 뜻하는 ‘포템킨 빌리지(Potemkin village)’란 관용어가 나왔다. 흑해함대의 창설자인 포템킨은 10살 연상의 예카테리나 2세와 내연관계였다(정부 23명 중에서 제일 가까워 비밀 결혼설도 나돌았다). 최근에는 ‘포템킨 경제(Potemkin Economy)’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속은 문드러졌어도 겉은 화려한 경제를 일컫는 용어다. 어느 나라가 해당될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러시아는 1905년 1월부터 거대한 혁명으로 빠져들었다. 먼저 1월 말(1월22일·러시아력 1월9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 광장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차르(황제)를 직접 면담해 노동조건 개선을 건의하겠다던 노동자와 그 가족 15만 명이 경찰과 군대의 무차별 총격으로 3,8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기대했던 차르의 성은(聖恩) 대신 총알이 날아왔다는 사실에 황제와 조국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신뢰는 단박에 깨졌다. 소요와 파업 사태는 전국으로 번져 ‘차르는 없다’, ‘전제 타도’ 구호가 나왔다. 4월까지 파업 참여자는 81만 명으로 불어났다. 흑해 인근의 도시들에서도 차르의 군대와 시민들이 맞서고 있었다. 전함 포템킨은 이런 상황에서 오데사 항구에 입항했다. 미완인 1905년 혁명은 1차 러시아 혁명으로도 불린다.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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