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는 매일 매일 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입니다.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과학관을 만들겠습니다.”
이정모(사진) 서울시립과학관장은 12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과학자들은 실패하는 사람인데, 우리는 이들을 성공하는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실패를 거듭하다가 제대로 성공하면 노벨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우리는 남들이 한 것을 재연하는 추격형에 머물러 있었다”며 “이제는 실패를 경험하고 용인하는 선도형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는데 실패하고, 설사 가설을 세웠더라도 실험하고 관찰하는 데 실패한다. 심지어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하는 데도 실패하면서 논문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다.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숱한 실패를 거듭한다. 그런 차원에서 과학관이 실패를 경험하는 곳이라는 게 이 관장의 생각이다. 자신이 직접 스케치하고, 오리고 붙이면서 자신이 세운 가설대로 만들어 본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 이런 실패작을 버리는 게 아니라 전시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모색한다. 왜 이런 생각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결과물을 냈는지를 전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실패 지점을 찾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나의 실패를 통해 새로운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과학관에 올 때는 내 아이가 과학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옵니다. 그리고 휘황찬란한 전시물을 봅니다. 나갈 때는 ‘과학자들은 대단한 사람이다. 우리 애는 터무니도 없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과학관이 과학을 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과학자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이 관장이 ‘실패를 경험하는 과학관’을 떠올린 이유다.
지난 5월 19일 서울 도봉구에 문을 연 서울시립과학관은 초등학생이 아닌 중고생을 위한 과학관을 목표로 한다.
이 관장은 “전국에 127개의 과학관이 있는데, 126개가 초등학생 어린이한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우리는 초등학생을 위한 과학관이 아니라 중고생을 목표로 삼았다. 과학이 어렵고 재미없다는 것을 알려 주겠다”고 말했다.
‘실패를 경험하는 과학관’을 위해 중고생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어렵게 구성했고, 전시물 높이를 높여서 일부러 불친절하게 했다. 글씨도 작게 만들었다. 불친절한 과학관에 익숙해지면 다양한 장비를 각자에 맞춰 관람할 수 있다.
중고생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재직 경험이 바탕이 됐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초등학생의 관람을 줄이기 위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보내는 협조 공문을 모두 없앴다. 그리고 입장료를 두 배로 올렸다. 중고생이나 성인 대상으로 목요일 저녁마다 각 분야 최고의 과학자들과 만나는 강연회를 열었다. 처음에는 관람객이 텅텅 비었지만, 1년 지나니 가득 찼다. 강연회가 끝난 뒤 맥주집에서 뒷풀이를 했다. 교사·출판인·과학자들이 서로 어울렸다.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이 관장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성공을 보고 국립과천과학관에서 19금 과학콘서트를 열었다. 성인용이라는 의미에서 19금이 붙었다”면서 “그런데도 300석이 꽉 찼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 관장은 “과학고등학교는 좋은 시설에서 좋은 선생님과 실험을 한다. 과학고를 안 갔다고 해서 기회를 뺏으면 안 된다. 과학관에 과학고 수준의 시설을 갖춰 과학고에 가지 못한 일반 학생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교사들이 과학관이 만든 프로그램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특정 실험을 제안하면 과학관 소속 과학자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구성할 것”이라며 “처음에는 숱하게 실패하겠지만, 실험을 반복하다가 성공하면 논문도 낼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 관장은 스스로를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라고 말한다. 그는 “과학자와 대중이 있는데, 간격이 멀다”라며 “거간꾼이 필요한데 바로 커뮤니케이터가 하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논문은 과학자 사이에서는 명확하고 쉬운 글이다. 과학자가 그래프를 보면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지만 일반인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과학자가 직접 설명해 주면 이해하기 쉽다. 그렇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바쁘기도 한데다 논문을 잘 쓰는 과학자가 설명까지 잘하기는 쉽지 않다.
“대학생 시절, 어머니에게 그날 배운 것을 설명해 드렸어요. 처음에는 이해조차 못하던 어머니가 너무 재미있어 하는 거에요. 대학 2학년 때 야학 교사를 했는데, 정말 잘 가르쳤어요. 과학을 주제로 알기 쉽게 설명하는 일이 제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아요. 독일 본 대학에서 유학할 때 교포 자녀들한테 1년간 준비해서 독일어로 한국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죠.” 그가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가 된 이유다.
이 관장은 개인들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오픈 랩’을 내년 중에 선보일 계획이다. “과학관에서는 연구 장비를 지원합니다. 일반인들도 과학관의 장비를 갖고 실험을 할 수 있는 거죠. 처음에는 과학관 프로그램을 통해 장비 사용법을 배워야 하지만, 나중에는 자기 과제에 맞게 다양한 장비를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