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10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동관 466호 대법정은 50명이 훌쩍 넘는 변호사들로 붐볐다. 법무법인 태평양을 비롯해 광장·세종·화우·율촌·지평·KCL 등 내로라하는 국내 로펌에서 수십년씩 경력을 쌓은 공정거래 사건 전문가들이었다. 재판장인 윤성원 서울고법 행정7부 부장판사가 이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데만 5분여가 걸렸다. 공정거래위원회를 주축으로 모인 삼성전자·애플·인텔·미디어텍 연합군과 이동통신용 반도체 칩셋 시장을 장악한 퀄컴의 설전은 이렇게 시작했다. 미래 이동통신 시장의 패권을 건 싸움이기에 재판의 긴장감은 더욱 팽팽했다.
세계 정보기술(IT) 공룡들의 공적인 퀄컴의 시작은 초라하고 위태로웠다. 퀄컴은 2세대(2G) 이동통신 원천기술인 코드분할방식(CDMA)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검증이 안 돼 시장에서 외면 받던 처지였다. 그러다 1990년대 이동통신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던 한국의 도움으로 성장의 발판을 만든다.
퀄컴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함께 CDMA 상용화에 성공한 뒤 3세대(3G) 광대역코드분할다중접속(WCDMA), 4세대(4G) 롱텀에볼루션(LTE)까지 계속해서 국제 표준의 역사를 써나갔다. 공정위와 시장조사기관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퀄컴은 2G~4G에 걸쳐 이동통신 표준필수특허(SEP)를 최다 보유한 기업이며 지난해 기준 이동통신용 모뎀칩 시장의 50%를 장악하고 있다.
공정위는 퀄컴이 독점적 지위를 남용해 이동통신 시장의 발달을 저해해왔다고 판단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퀄컴은 우선 인텔·브로드컴·미디어텍 같은 통신용 칩 제조사들에 SEP 라이선스를 주지 않거나 제한적으로 제공했다. 삼성전자·LG전자·애플을 포함한 휴대폰 제조사에는 통신용 칩 공급을 볼모 삼아 다른 제품을 ‘강매’하거나 특허 라이선스를 부당하게 연계한 계약을 맺었다. 자사 특허는 제한적으로 제공하면서 휴대폰사 특허는 무상으로 받기도 했다.
“시정명령 멈추면 더큰 피해”
애플·삼성 등 연합군 호소
애플은 이날 재판에서 “퀄컴이 애플의 IT 혁신에 무임승차했다”고 비난했다. 삼성전자는 “퀄컴의 ‘갑질’ 때문에 NTT도코모와 추진하던 통신칩 제조사 합작 계획을 철회해야 했다”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12월28일 이런 관행을 멈춰야 한다며 시정명령과 함께 사상 최대 과징금 1조300억원을 퀄컴에 부과했다. 앞으로 퀄컴이 칩 제조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때는 판매처나 칩셋 사용 권리를 제한해서는 안 되며 휴대폰사에도 부당한 계약 조건을 강요하지 말도록 했다. 퀄컴은 이런 명령이 “이동통신 업계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초래할, 전례 없고 극히 위험한 실험”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정위에 이어 미국 연방무역위원회(FTC)도 퀄컴을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에 제소했다. 중국·유럽연합(EU)·대만 정부도 퀄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상태다.
퀄컴 “본안 소송결과 전
효력 발휘땐 회복 불가능”
이날 재판은 퀄컴이 지난 2월 서울고법에 제기한 공정위 시정명령·과징금 불복 소송에 앞서 시정명령 효력을 당장 멈춰달라며 낸 행정신청사건이다. 퀄컴은 시정명령이 효력을 발휘하면 “회복 불가능한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고 이는 퀄컴뿐만 아니라 업계와 사회 전반에 규제로 인한 불필요한 거래비용을 늘린다”고 주장했다.
반면 공정위 연합군은 당장 효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업계가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각 기업이 5세대(5G) 이동통신 기술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불공정거래 관행이 고쳐지지 않으면 퀄컴이 결국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는 뜻이다.
삼성전자 측 변호인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의 5G 통신 기술 시연을 눈앞에 두고 있다”며 “올해가 기업들이 5G 통신 기술을 발전시킬 마지막 기회인 만큼 시정명령이 즉각 효력을 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