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감자의 과거와 현재, 미래



1586년 7월28일, 영국 폴리머스항. 스페인 선단을 파괴, 약탈하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사략선(私掠船·privateer, 국가로부터 적국 선박에 대한 해적질을 인정받은 민간 선박 ) 함대가 특별한 화물을 내렸다. 북미산 감자였다. 화주(貨主)는 토머스 해리어트(Thomas Harriot). 부등호(>, <)를 처음으로 문서에 남긴 수학자이며 갈릴레이 갈릴레오보다 4개월 앞서 천체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한 과학자였던 해리어트는 왜 감자를 들여왔을까.






태양의 흑점을 연구하기 위해 들렀던 아메리카 대륙에 그는 폭 빠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총애하는 신하였던 월터 롤리 경의 수학 개인교사 겸 고문으로 일하던 그는 북미에서 천체의 움직임뿐 아니라 모든 것을 샅샅이 훑었다. 롤리 경이 개척하려던 로어노크섬 식민지(Roanoke island colony)의 생태계와 환경을 2년 넘게 조사하는 그는 드레이크 함대 덕분에 죽다가 살아났다. 물자 부족과 기아에 시달리다 드레이크의 함대를 만난 덕에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로어노크 식민지 개척을 위해 유럽인 최초로 알골킨 원주민 언어까지 습득했던 그는 신대륙에서 부지런히 식물의 씨앗과 열매를 모았다. 해리어트의 화물 목록에는 원주민들이 ‘오페나우크(openavk)’라고 부르던 감자뿐 아니라 ‘우포웍(uppowoc)’으로 지칭하던 담배도 있었다. 해리어트는 인디언의 담배 건조기술까지 소개해 북미 담배농업의 선구자로도 손꼽힌다. 해리어트는 귀국 2년 뒤인 1588년 출간한 ‘새로 발견한 버지니아에 대한 간략하고 생생한 보고서’에서 감자를 이렇게 설명했다. ‘뿌리 식물인 오페나우크는 영양가도 높고 맛이 있다.’

정말 맛이 있었을까. 영국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리어트가 올린 감자를 먹은 롤리 경은 소화 불량에 걸리고 말았다. 실은 종자 감자를 제대로 조리하지 않고 섭취한 탓이었으나 영국 상류층은 땅속에서 자라는 감자를 ‘악마의 맛 없는 식물, 천한 식품’로 여겼다. 영국 주류 계층의 외면에도 감자는 급속히 퍼졌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많이 먹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이 수탈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감자를 심었다. 감자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상대적으로 비싼 밀을 제치고 아일랜드 농민들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 본격적인 감자 재배는 아일랜드보다 늦었지만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각국은 구황 작물을 넘어 감자를 국민들의 주식으로 삼으려 애썼다. 각국의 전통 요리와 결합한 다양한 감자 요리도 줄줄이 선보였다. 17세기 유럽의 인구 급증을 감자 덕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감자는 유럽을 넘어 아시아에도 전파돼 무수히많은 사람을을 굶주림에서 구해냈다. 감자가 널리 퍼지며 18세기부터 원조 논쟁까지 일었다. 감자를 유럽에 전파한 나라가 어디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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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유래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충돌한다. 첫째 앞서 살펴본 것 같이 토마스 해리어트가 갖고 왔다는 설. 둘째 학설의 내용은 약간 다르다. 드레이크의 사략 선단이 카리브 해의 카르테헤나 항구를 습격했으나 목표물인 스페인 보물선들은 반나절 전에 출항해 화를 모면했다. 보물 선단을 놓친 드레이크의 함대는 서인도제도의 스페인령을 마구 약탈하는 과정에서 감자를 발견하고 헤리어트에게 줬다는 것이다. 세 번째 해석은 일찍부터 바닷길 탐험에 나섰던 스페인에는 이미 1520년부터 감자가 소개됐다는 것이다. 영국에 감자가 소개된 것도 영국 침공에 실패(1588년)한 스페인 무적함대의 난파선에서 식량용 감자 상자가 해안가에 도달했기 때문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어떤 학설이 맞는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게 두 가지 있다. 첫째, 상식적으로 영국보다 훨씬 앞서 신대륙(미주 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의 감자 도입이 빨랐을 것으로 보이지만 문헌 근거가 부족하다. 헤리어트는 기록을 남기고 책까지 출간한 덕분에 감자를 전파한 주인공으로 각인됐다. 둘째, 드레이크 함대는 스페인 보물 선단의 금과 은을 약탈한 것보다 훨씬 귀중한 보물을 찾아냈다. 감자로 인해 전 세계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줄었으니 감자야말로 금과 은보다 가치 있는 보물이었던 셈이다.

감자가 ‘신의 축복’으로 자리 잡을 즈음, 아일랜드에서는 감자로 인한 대참사가 발생했다. 감자 뿌리가 썩는 식물 전염병이 발병한 1845~1852년까지 아일랜드에서는 11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진 사람도 100만 명을 넘는다. 아일랜드를 순식간에 폐허로 만든 ‘감자 대기근(Irish Potato Femine)’은 영국에 대한 반감도 증폭시켰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이 대기근을 방조했다고 여긴다. 영국은 나중에야 구호에 나섰을 뿐이다.

신의 축복과 저주가 뒤섞인 역사를 갖고 있는 감자는 오늘날도 가장 중요한 식량 자원의 하나다. 세계 어느 국가에서나 감자는 자국산으로 여긴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지 불과 3세기 남짓한 우리나라에서도 감자는 토착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미래 식품으로도 손꼽힌다. 우주선에서 재배 실험 결과 감자는 무중력 상태에서도 잘 자랐다. 우주선 내부의 이산화탄소 가스를 흡수하고 산소를 생성하는 효과까지 거뒀다. 감자의 미래는 저주가 사라지고 축복만 가득하면 좋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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