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이윤택 “연극으로 하고 싶은 말 작정하고 하겠다"

현대인 소외 다룬 美 부조리극 ‘동물원 이야기’ 원작으로

소시민적 삶의 병폐 지적하는 ‘노숙의 시’로 재창작

현대사 가로지르는 늙은 노숙인 분한 명계남, 이윤택의 페르소나로

연극 ‘노숙의 시’에서 늙은 노숙자 ‘무명 씨’ 역을 맡은 명계남(오른쪽)과 ‘김 씨’ 역의 오동식 /서은영기자연극 ‘노숙의 시’에서 늙은 노숙자 ‘무명 씨’ 역을 맡은 명계남(오른쪽)과 ‘김 씨’ 역의 오동식 /서은영기자


26살의 앳된 청년 이윤택이 77년 부산 시민회관 소극장에서 미국 현대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의 ‘동물원 이야기’를 관람하고 극장을 빠져나온다. 김도훈이 연출하고 추성웅이라는 내로라하는 배우가 나온 연극이었다. 그런데도 주로 졸았고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의 연극은 이윤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날 이후로 이윤택 감독은 “내 손으로 그 작품을 올려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실행으로 옮기는 데는 40년이 걸렸지만 희곡을 다시 쓰는 데는 사흘이면 충분했다. 소통이 부재한 현대 사회와 인간의 고독을 이야기했던 ‘동물원 이야기’는 말 그대로 ‘뼈’만 남았다. 대신 이윤택은 ‘침묵하는 시민’과 ‘사회적 인간을 꿈꾸는 시민’의 갈등과 화해를 주제로 살을 덧댔고 이 과정에서 6할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머지 4할은 주연 배우 명계남과 오동식, 현대사를 가로지른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재료로 썼다.




23일 서울 대학로 30스튜디오에서 열린 연극 ‘노숙의 시’ 기자간담회에서 연출가 이윤택(오른쪽) 감독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서은영기자23일 서울 대학로 30스튜디오에서 열린 연극 ‘노숙의 시’ 기자간담회에서 연출가 이윤택(오른쪽) 감독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서은영기자


40년만에 이윤택을 움직인 것은 지난 겨울의 광화문 광장, 그리고 명계남과의 만남이었다. 23일 서울 대학로 30스튜디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 감독은 “광화문광장 블랙텐트에서 연극을 해보니 극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진지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고 무거운 담론을 작정하고 말하는 연극을 나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4·19에서 문재인 정부로 이어진 한 축, 5·16 군사혁명에서 박근혜 정부로 이어진 또 한 축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면 이제는 이분법을 넘은 새로운 시민혁명을 이야기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에 한달음에 썼다”며 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명계남에 대해서도 이 감독은 “과거에 명계남 배우가 2시간 남짓 모노드라마를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 가는 모습을 보고 말의 힘이 보통이 아닌 배우라고 생각했고 이 배우에게 맞는 작품을 고민하던 중 40년간 간직했던 꿈을 꺼내 들었다”며 “이번 작품은 무자비하게 말을 쏟아내야 하는데 명계남이 아니면 소화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노숙의 시’는 벤치에서 만난 두 남자의 대화 형식으로 진행된다. 전후 세대를 상징하는 명계남이 연기한 무명 씨는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북쪽 숲을 향해 움직이는 자, 87년 민주화 세대를 상징하는 오동식이 연기한 김 씨는 한 곳에 머물며 침묵하려는 자다. 무명 씨가 한국전쟁부터 동백림사건과 동아투위, 촛불혁명까지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무명 씨와 김 씨의 갈등은 점차 고조된다.


명계남이 연기한 늙은 노숙자 ‘무명 씨’는 이윤택의 페르소나. 실제로 명계남의 무대 의상은 이윤택의 옷이다. “당신과 내가 서로 혼자일 때 우리는 아무것도 아냐” “네가 길을 찾으려면 길을 꿈꾸어야 해” 등의 대사는 이 연극의 주제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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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이 말하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의미는 ‘전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게임에 능수능란했던’ 52년생 세대에 대한 헌사다. 이 감독은 “파란만장한 한국 역사를 가로질러온 영광스러운 세대인데 대부분 실직자가 되어 힘이 없는 게 짠하더라”며 “격랑의 시대를 힘겹게 건너온 전후세대의 영광과 오욕을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말했다.

이윤택과 명계남, 두 사람 모두 52년생.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52년생, 전쟁통에 태어나 살아남은 전후세대다. ‘52년생’ 이야기가 나오자 이 감독은 특유의 거침없는 화법을 이어갔다. 그는 “극 중에서 모든 세입자들을 하인처럼 부리며 군림하는 하숙집 여주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 하숙집 검둥개는 일상성에 갇혀 사는 소시민성을 상징한다”며 “광장의 촛불이 승리하는 날 결국 여주인과 검둥개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광장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게릴라극장 폐관 전 마지막 공연으로 올렸던 ‘황혼’ 이후 이번 작품에서도 주연을 맡으며 명계남은 명실공히 이윤택이 믿고 쓰는 배우가 됐다. “정치색이 짙어져 아무도 나를 무대에 불러주지 않았고 내 돈을 들여서라도 무대에 서야 했다”던 명계남에게 내년도 계획을 묻자 이 감독이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명계남 배우는 내년에 선보일 크리스토퍼 말러의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에서 파우스트 박사를 연기할 겁니다. 블랙리스트로 찍혀 여러 차례 지원을 거부당했던 오페라 ‘꽃을 바치는 시간’ 무대에도 오를 겁니다.” 명계남이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까지 내년도 제 계획이었습니다.”

공연은 30스튜디오에서 9월17일까지.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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