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 블록체인발 산업혁명 바람이 불고 있는 가운데 국내 금융권에서도 작지만 의미 있는 실험들이 시작되고 있다. 당국의 규제 등 문턱이 여전히 높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기회를 선점할 수 없다”는 금융 최고경영자(CEO)들의 위기감이 반영돼 블록체인 기술이 다양하게 접목되고 있는 것이다.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한은행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핸드폰으로 골드바를 선물하는 혁신적 서비스를 올 하반기께 내놓는다. 물론 은행권 최초의 시도다. 기존에 골드안심서비스를 해왔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해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이 서비스가 상용화되면 고객은 신한은행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인 ‘신한S뱅크’에 접속해 골드바를 구매한 후 상대방의 핸드폰 번호만 입력하면 기프티콘처럼 골드바를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게 선물할 수 있다. 골드바를 선물 받은 상대방은 수령할 은행 지점을 선택한 후 창구를 방문하면 곧바로 실물을 찾을 수 있다. 신한은행은 처음에는 돌 반지 정도인 한 돈(3.75g) 단위로 한 뒤 점차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거액을 들여야 살 수 있었던 골드바를 소액으로도 구매 가능하고 누구에게나 쉽게 선물할 수도 있어 돌풍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신한은행은 최근 블록체인팀을 신설했다.
신한은행은 무역금융에서도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무역금융에 블록체인을 접목하는 것은 주로 HSBC나 바칼로레아 같은 글로벌 외국계 금융사들이었지만 신한은행이 이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수출서류를 담보로 하는 경우가 많은 무역금융에서는 서류 위변조 리스크가 상존하는데 신한은행은 서류에 블록체인 기술을 넣어 신뢰도를 높이고 계약기간을 단축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다.
우리은행도 최근 블록체인팀을 구성해 블록체인 기술 업체인 데일리인텔리전스·더루프와 손잡고 국내 은행권 최초로 ‘토종 디지털화폐’를 내놓을 계획이다. 우리은행이 제휴처와 손잡고 위비코인을 발행하면 이를 카드나 모바일 앱 등으로 받아 제휴처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위비코인은 포인트 개념과 비슷하지만 디지털화폐라는 점에서 혁신적인 시도로 풀이된다. 위비코인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지만 선불전자지급수단 방식으로 유통된다는 점에서 다른 가상화폐와 다르다. 은행에서 발행하는 디지털화폐는 이더리움이나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이 큰 점을 보완해 은행과 제휴처가 손잡고 발행, 액면가격을 그대로 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KB국민은행·KEB하나은행·NH농협은행 등도 블록체인 차세대 시스템 본격 도입을 위한 발걸음을 떼고 있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2월 국내 금융권 최초로 블록체인을 활용한 해외송금 서비스 기술검증에 성공했다. 기존 해외송금 서비스는 중개은행을 거치는 해외송금망 스위프트(SWIFT)망을 이용했지만 이를 블록체인 기술로 전환한 첫 사례다. 아직까지 국내 은행 중 이 같은 기술을 실제 거래에 적용한 사례는 없으나 국민은행은 추후 금융당국과의 협의를 통해 상용화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해외송금 시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면 수수료 등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기존 송금비용은 가령 미국에 100달러를 보내려고 하면 송금수수료 1만원, 스위프트망을 이용하는 전신료 8,000원, 중계수수료 1만2,000원 등 총 4만8,000원가량이 들었는데 이를 블록체인 기술로 전환하면 송금수수료를 10분의1 수준인 5,000원 안팎으로 줄일 수 있다. 지난 3월에는 블록체인을 활용한 모바일 앱 관련 기술 특허도 출원했다.
NH농협은행은 블록체인 기술 상용화 경험이 있는 핀테크 기업 ‘더루프’과 기술 제휴하고 농협에 맞는 시범 모델을 공동 연구하고 있다. 자체적으로도 대학원과 연계한 교과과정을 개설해 블록체인 관련 전문인력을 양성할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농협은행의 오픈 플랫폼(Open Api)를 이용하고 있는 핀테크 업체에 블록체인 기반의 계약 및 거래내역 증명 서비스 모델을 추진할 계획이다.
개별은행 단위뿐 아니라 은행들이 연합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려는 시도도 잇따르고 있다. 신한·국민·우리·기업·KEB하나은행 5개 은행은 글로벌 블록체인 컨소시엄인 ‘R3 CEV’에 가입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논의하고 있다. 현재 디지털화폐 발행, 국가 간 송금·정산 플랫폼 구축 등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R3 CEV는 설립 초기 바클레이스·크레디트스위스 등 9개 은행에서 출발해 현재 전 세계 86개 금융기관이 참여 중인 컨소시엄으로 올 상반기만도 1억700만달러(약 1,20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면서 “국내 5대 은행이 이미 참여하고 있으며 농협은행은 올 하반기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다만 국내 은행의 블록체인 기술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 가상화폐까지 접목한 결제·송금 등 다양한 서비스로 발전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스위스나 중국에서는 이미 블록체인 기반의 비즈니스 모델 실험이 활성화돼 있는데 우리나라는 부족한 블록체인 전문가 풀에다 당국 규제 등의 이중고로 기술개발과 접목이 더디다. 은행권 관계자는 “블록체인 활성화를 위해서는 규제 부담 없이 새로운 핀테크 서비스를 맘대로 시험해 볼 수 있는 자유로운 여건이 필요하다”며 당국의 전향적인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새 금융감독원장에 감사원맨이 유력시되면서 금융산업을 육성보다 규제로 더 죄려는 분위기가 강화돼 블록체인 같은 신산업이 더 위축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김보리·이주원기자 bori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