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프리뷰] 오직, 당신만을 위한 시공간

장소특정 공연 '천사-유보된 제목'

내달 3일까지 매일 40명씩 관람

공연이 시작되면 관객은 극장 앞 마당에 설치된 부스에서 VR 헤드셋을 쓴 채로 작은 창을 통해 극장을 넘어다 보며 기억의 문턱으로 이동한다. /사진제공=서울문화재단공연이 시작되면 관객은 극장 앞 마당에 설치된 부스에서 VR 헤드셋을 쓴 채로 작은 창을 통해 극장을 넘어다 보며 기억의 문턱으로 이동한다. /사진제공=서울문화재단




“불행히도 널리 알려진 사실은, 연극에는 화학작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희곡, 공연, 관객의 성격이 한데 섞인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폭발의 요소들이 차가운 채로 남게 된다.”


극작가 아서 밀러가 남긴 이 말에서 희곡을 ‘극장’으로 바꾼다면 관객 한 사람만을 위해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장소 특정 퍼포먼스 ‘천사-유보된 제목’에 꼭 들어맞는다.

29일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막을 올리는 이 작품은 보통의 연극이 극장 문을 들어서야 시작되는 것과 달리 극장 앞마당에 설치된 부스에서 시작된다. VR(가상현실) 헤드셋과 MP3에 연결된 이어폰을 꽂은 채로 극이 시작되고, 흘러나오는 영상과 소리가 관객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탐색할 수 있도록 시작점으로 이끈다.

캄캄한 극장 안에는 관객과 소녀 두 사람뿐이다. /사진제공=서울문화재단캄캄한 극장 안에는 관객과 소녀 두 사람뿐이다. /사진제공=서울문화재단



발걸음을 옮겨 들어선 극장의 풍경 역시 낯설다. 캄캄하게 암전된 채로 관객 한 사람만을 위한 좌석 ‘B구역 9열 1번’에 조명이 드리워졌다. 알 수 없는 소리, 낯선 어둠이 긴장감을 돋운다. 나를 비추던 조명마저 꺼지자 분출하는 아드레날린에 심장 박동이 커진다. 이윽고 환해진 객석 저편에 소녀가 가만히 앉아 있다. 단 한 명의 관객을 극장 뒤편으로 이끄는 소녀. 긴장감이 고조된 나머지 소녀의 정체를 끊임 없이 의심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곳곳에 붙어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른 공연에선 숨겨진, 보조적 공간이었던 분장실, 대기실 등 무대 밖 공간이 오늘은 관객의 감정을 직접 건드리는 조연급 장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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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간, 이어폰을 꽂은 채로 암흑 속을 응시한다. 다시 한 번 이어폰 속 음성이 관객의 과거를 소환한다. 이동하는 중에도 이어폰 속 음성이 던졌던 질문들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남산예술센터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낡고 후미진 공간과 이를 둘러싼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극장의 서사와 관객의 서사가 맞닿는 순간이다.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돼 있던 비일상의 공간이라 여겼던 극장이 주변, 관객과 연결된 개방의 공간이자 일상의 공간으로 재인식되는 순간이다. 두 발로 극장 공간 곳곳을 누비며 혼자만의 여정을 떠났던 관객의 기억은 또 한 페이지의 서사가 되고 이것이 공간과 개인을 엮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결국 이 작품의 주인공은 1962년 건축가 김중업이 세운 극장(의 역사와 공간성)과 극장을 누비는 관객 자신이다. 이 작품의 압권은 마지막 부분이다. 극장의 꼭대기, 설계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국가안전기획부가 비밀리에 증축한 공간에 앉아 지난 여정, 지난 삶을 되새김질한다.

앞서 남산예술센터에서 선보였던 ‘남산 도큐멘타’ ‘창조경제-공공극장편’ 등 극장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들이 극장의 공공성, 역사에 집중했다면 이 작품은 극장이라는 공간의 특성과 관객의 내면을 연결해 화학작용을 일으키는데 포커스를 두고 있다.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서현석은 앞서 영등포, 세운상가 등의 공간에서 장소 특정 퍼포먼스 작업을 하며 모더니즘의 흔적이 남은 공간을 탐구했다. 서 연출은 “극장 속 고독한 여정에서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연은 다음 달 3일까지, 매일 40명씩 총 240명이 관람할 수 있다.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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