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9월 18일, 포함 5척에 분승해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온 영국군이 파쇼다에서 병력을 풀었다. 키치너 장군이 이끄는 영국-이집트 혼성군의 군세는 약 1,500명. 영국군은 파쇼다 도착 직후 진지를 꾸리는 한편 두 달 전 도착한 프랑스군에 전령을 보냈다. ‘프랑스 국기를 내리고, 이곳 파쇼다를 떠나라.’ 영국에 맞서게 된 프랑스는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마르샹 소령의 프랑스군 원정대는 약 120명. 12명의 프랑스군 장교와 부사관이 세네갈 용병을 지휘하는 현지인 프랑스군이었다.
유럽의 두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가 왜 아프리카에서 맞붙었을까. 당시 상황부터 보자.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경쟁이 한창이었다. 다른 대륙에 비해 쓸모없는 땅으로 여겼던 아프리카를 놓고 독일과 이탈리아, 벨기에까지 끼어든 형국. 대륙 북서부를 선점한 프랑스는 중앙을 가로질러 아프리카 동해안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수단 남부의 파쇼다(요즘 지명은 코도크·Kodok)에 프랑스군 원정대가 나타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마르샹 소령 등 12명의 프랑스 장교들과 세네갈 보병 120여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가봉을 출발해 14개월 동안 아프리카 중앙부 3,200㎞를 탐험한 끝에 1898년 7월 파쇼다에 닿았다.
프랑스군이 수단 남부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영국도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다.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와 파쇼다에 도착한 영국군 지휘관 키치너 소장(당시 48세)은 프랑스군 마르샹 소령(35세)에게 ‘수단 지역의 우선권은 영국에게 있다’는 논리를 들이댔다. 당시 수단은 오스만 투르크 이집트령의 일부였고 영국은 이집트를 14년째 점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1895년 찰스 조지 고든 장군의 영국군 5,000여명이 수단 원주민에게 몰살 당한 ‘하르툼 공방전’까지 발생한 지역. 영국인 수천명이 피를 흘렸으니 공식적인 식민지는 아니어도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샹 소령은 철수하라는 영국의 요구를 일언 지하에 잘랐다. 마르샹의 긴급 구원 요청과 양군의 대치 소식은 영국과 프랑스를 들끓게 만들었다. 프랑스에서는 ‘전쟁 불사론’까지 일었다. 프랑스는 병력을 증파했을까. 천만에. 위기는 갑작스레 대화 분위기로 바뀌었다. 프랑스는 11월 초 파쇼다 철수라는 단안을 내렸다. 마르샹 소령의 원정대도 발길을 돌렸다. 이듬해 나일 강을 경계로 이집트는 영국이, 모로코는 프랑스가 각각 차지한다는 이면합의가 맺어졌다. 프랑스로서는 양보임이 분명했다.
프랑스는 왜 백년전쟁 이래 7년 전쟁에서 유럽 본토는 물론 북미와 인도·아프리카에서 피나는 경쟁을 벌이고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맞서 싸워 번번이 패배를 안긴 영국에게 양보했을까. 새로운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독일을 견제하려고 프랑스는 영국과 해묵은 감정을 접었다. 마침 프랑스에서 유대계 포병장교 드레퓌스의 독일 간첩 혐의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50억프랑의 배상금을 물었던 보불전쟁(1871년)의 패배를 잊지 말자’는 일부 언론의 부추김으로 ‘반영(反英)’ 기운은 ‘반독(反獨)’ 분위기로 바뀌었다. 대 독일 공동 전선 형성이라는 더 큰 목표를 위해 식민 팽창을 자제한 것이다.
제국주의 식민 경쟁의 타협점인 파쇼다 사건은 또 다른 경쟁을 잉태하며 인류의 피를 불렀다.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과 독일의 대립구도는 삼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과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 간 대립 구조로 이어지고 끝내 1차 세계대전으로 번졌다. 최근 개봉된 영화 ‘던커크’에서 보는 것처럼 영국과 프랑스는 2차대전에서도 동맹국으로 함께 싸웠다. 두 나라는 요즘에도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그렇다. 군사 동맹(북대서양조약기구·NATO)으로 묶여 있다.
프랑스가 독자 노선을 천명할 때마다 영국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어도 두 나라는 동맹과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분위기가 시나브로 바뀌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주도로 유럽 연합(EU)이 결성되고 영국은 지난 2016년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에서 탈퇴(브렉시트)해 버렸다. 프랑스가 영국과 멀어지고 독일과 가까워질 줄은 누가 알았겠나. 파쇼다 사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제 동맹 관계가 변하는 계기였다는 점이다. 국제 관계에서는 영원한 동맹도, 적도 없기 마련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