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품공여, 학력위조, 파벌 간 갈등, 선거법 위반, 적폐청산, 탄핵. 정치판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와 관련해 등장한 단어들이다.
종단 비판 발언으로 제적 징계를 받은 명진스님이 18일간 단식하다 쓰러지고, 룸살롱, 도박, 은처, 폭행, 돈 선거 등 종단 내부의 적폐청산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지는 가운데 오는 10월12일 진행되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선거 후보등록이 18일부터 시작됐다. 총무원장 직선제 무산으로 선거는 간선제로 치러진다. 이날 오전 자승 현 총무원장이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설정스님(수덕사 방장)과 자승스님이 총무원장 선거 출마를 만류했다고 폭로했던 수불스님, 북한 지원 사업을 주도했던 혜총스님이 등록을 마쳤다. 인각사 주지 원학스님도 후보등록 마감 예정일인 20일 등록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 집행부를 향해 포문 연 수불스님 “선관위 선거 중립 지켜야”
수불스님은 이날 후보 등록 후 기자회견을 열고 “종단 집행부는 제35대 총무원장 선거에도 개입해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등 종헌종법에서 규정한 교역직 종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를 심대하게 위반하고 있다”며 “위기에 빠진 종단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수많은 억압과 불이익을 감내하며 총무원장 선거에 입후보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억압 내용에 관해서는 “25일 이후 중앙선관위로부터 후보로 하자가 없다고 확정되면 더 자세히 말하겠다”며 ‘말 못할 상황’임을 암시했다. 또한 금품 살포로 인한 선거법 위반 의혹에 대해서는 “신도들이 매년 해오던 것인 만큼 오해가 크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잘못 자리잡은 ‘관행’을 에둘러 지적했다.
설정스님은 앞서 지난 8일 기자간담회에서 “불교를 중흥시키고 종단 발전을 도모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소임을 외면하지 않고 성실히 그 길에 나서겠다”고 출마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아울러 서울대 농대 졸업의 학력위조 의혹에 대해 “1976년 서울대 부설 방송통신대 농학과를 졸업했다”면서 오해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과했다. 교계는 선거인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앙종회와 교구본사에 자승 총무원장의 영향력이 큰 만큼 그가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진 설정스님이 유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이번에도 간선제... 왜 직선제 도입 실패했나
자승 현 총무원장은 지난 2013년 34대 총무원장 출마 당시 ‘총무원장 선거 방식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총무원은 이듬해 5월 선거인단을 대폭 확대하는 ‘선거법’을 입법예고 했으나 종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때 자승스님은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지만 2016년 돌연 입장을 바꿔 “직선제는 종단이 제2의 분규로 가는 것”이라며 강한 반대 의견을 밝혔다.
이에 대해 조계종 관계자는 “자승 스님의 공약은 ‘직선제 도입’이 아닌, ‘직선제 검토’였다”며 “집행부에서도 총무원장 직선제를 추진했었지만 종회에서 부결됐다. 또한 종단은 사부대중(출가한 남녀 수행승인 비구, 비구니와 남녀신도인 거사, 보살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 100인 대중공사 등을 통해 종도들의 공의를 모으는 과정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님이 1만2,000명에 가까운 상황에서 직선제를 하기 위해 1만2,000명이 전원 다 참여할지, (출가한지)10년 이상의 승려가 참여할지 등의 방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들의 논의가 잘 안 이뤄지고 서로 대립만 심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직선제 도입 및 불교계 적폐청산을 주장하는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법일스님은 이날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결국 조계종이 직선제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며 “직선제를 하면 비구니승까지 선거에 참여하게 되는데, 비구니승이 참여하면 선거의 판도가 바뀔 것”이라고 평했다. 이어 “여론조사 결과 81%나 되는 종도가 요구하는 직선제를, 이를 공약으로 내건 자승스님이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종도가 요구하는 어떤 중요한 일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다.
법일스님은 ‘마곡사 금권선거’를 예로 들며 “선거법을 지켜야 할 선관위도 선거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3년 치러진 마곡사 주지선거에서 재판을 통해 원경스님 측근의 금품공여사실이 인정된 바 있다. 하지만 선관위에서 주지 자격에 이상이 없다고 결정했고, 원경스님은 마곡사 주지선거에 지난 7월 재출마해 주지에 당선됐다. 법일스님은 “결국 종단의 제도 개혁, 종법을 잘 지킬 수 있는 총무원장을 요구하는 것”이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