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어머니들은 아버지의 월급 다음 날이면 으레 은행에 갔다. 노란 봉투 속 월급과 몇 가지 통장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가 입금장을 써내려가다 보면 늘어나는 잔액에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빡빡한 세상살이에 희망찬 미래를 꿈꾸게 하며 마음을 달래주던 종이통장. 하지만 이런 따뜻한 추억도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변화에 기억 너머로 사라져가고 있다.
폰뱅킹이 처음 등장했을 때 편리함에 환호했던 것이 어제 같은데 휴대폰에 손가락질 몇 번 하면 입출금과 공과금 납부가 끝나는 모바일 세상이 도래했다. 월급과 봉투에 붙어 있던 급여내역서는 e메일로 안내되고 자동이체 된다. ‘월급이 로그인했다가 로그아웃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최근 금융권에서는 원칙적으로 전자통장을 발행하고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만 종이통장을 발급한다.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료계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금융권보다 한발 앞섰다. 지난 1990년대 처방전달시스템(OCS)과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PACS)이 도입되면서 의사의 처방지를 들고 물리치료실 등에 다닐 필요가 없어졌고 영상자료 보관도 쉬워졌다. 2000년대 초반 전자차트(EMR)의 등장으로 의료계는 획기적인 변환점을 맞았다. 의사의 처방기록, 환자의 병력, X레이나 자기공명영상(MRI) 자료 등 모든 기록이 디지털화됐다.
전자 차트로 축적되는 데이터베이스(DB)는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의사들이 환자의 병력을 손쉽게 참고할 수 있어 치료의 정확성이 높아졌다. 병원 내 협업·소통도 매끄러워졌다. 다양한 질환 연구에도 기초자료로 활용된다.
하지만 때로는 손글씨로 차트와 처방전을 쓰던 시절이 그립다. 꼼꼼하게 써내려간 수기(手記) 차트에는 환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정성 어린 진료 내용과 깊은 관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경북 포항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김모 아주머니는 일을 많이 해 무릎 관절염에 시달리고 있고 충남 부여에 사는 오모 할아버지는 수박 농사를 짓다가 허리를 삐끗했다는 내용이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 수기 차트를 들여다볼 때면 환자들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리고 내가 어떤 자세로 환자를 치료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환자와의 인연이 빠짐없이 기록된 수기 차트들을 파기 연한이 될 때까지 각별히 보관했다.
올해 초 국내의 한 대학병원은 보이스 키보드를 활용한 ‘음성인식 차트’를 진료에 도입했다. 이제 환자와 의료진의 음성만으로 진료기록이 만들어지는 세상이 왔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가 선물해준 편리함이 수기 차트에 녹아 있는 환자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대체할 수는 없다. 전자통장 시대를 앞두고 장롱에 깊이 처박혀 있던 옛날 종이통장에서 그 시절의 희망을 추억할 수도 있다. 디지털 시대가 준 편리함은 감사히 받아들이되 아날로그 시절이 남긴 ‘마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