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는 돈도 아니다. 맘 놓고 써도 되는 ‘공돈’이 수천만원이다. 이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최근 강남 재건축 시공사 수주전에서 대형 건설사들이 ‘공약’처럼 선전하는 이사비 얘기다. 하지만 그 이면도 들여다봐야 한다. 당장의 현금다발이 예상치 못한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지난 21일 국토해양부가 현대건설이 반포주공1단지(1·2·4주구) 조합에 제시한 7,000만원의 이사비에 제동을 걸었지만 이사비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재건축 수주전에서도 수천만원의 이사비 제공을 조건으로 조합원들의 표를 사려는 곳이 많은 탓이다.
오는 27일 반포주공1단지를 비롯해 서울 한신4주구 재건축, 잠실 미성·크로바아파트 등 굵직한 재건축 사업의 시공사 선정이 다음달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건설사별로 2,000만~7,000만원까지 이사비를 내건 상태다. 22일 잠실 미성·크로바 재건축에 입찰제안서를 낸 롯데건설은 이사비 1,000만원과 이주촉진비 3,000만원 등 총 4,000만원의 무상 지원을 약속했다.
이사비가 재건축·재개발 수주전에서 이슈가 된 것은 2010년부터 서울시가 재건축 공사비 투명화를 위해 ‘내역입찰제’를 실시하면서 더 이상 공사비나 조합원 부담금으로 차별화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시공사 수주전에서는 공사비와 무상지분율, 조합원 분담금 등을 차별화해 마케팅에 활용했지만 공사비를 세분화한 내역입찰제 이후에는 건설사들이 이사비, 조경 설계 등을 앞세운 마케팅에 주력하면서 거액의 이사비가 수주전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정비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사비나 해외 설계비와 같은 비용을 줄여 공사비를 낮춰 입찰하게 되면 오히려 조합원들이 저가 아파트라고 싫어한다”며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정말 이사를 위한 100만~200만원 수준의 지원금이 제공됐지만 이제는 수천만원의 이사비를 미끼로 제공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나타난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거액의 이사비 이면에는 그 못지않은 비용이 지출된다. 우선 조합원들이 내야 할 세금이 만만치 않다. 특별 소득에 따른 세금 22%에 다른 소득과 합쳐 종합소득세까지 내야 한다. 7,000만원의 이사비를 건설사 측에서 제공한다 하더라도 실제 손에 쥐는 돈은 5,000만원이 안될 공산이 크다. 완성된 집의 퀄리티가 떨어질 우려도 있다. 건설사가 지급하는 총 수천억원대의 이사비는 비용으로 회계처리 할 수 없다. 한 정비 업체 관계자는 “비용 처리를 받기 힘들면 그만큼 세금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게다가 건설사들이 무상 이사비를 지원하는 대신 마감이나 시공자재 등에서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익을 보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물론 당장 눈에 보이는 현금이 실제 시공사 선정전에서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강남의 한 대형 단지 조합원은 “대형 건설사들이 제시하는 조경이나 설계는 다 비슷비슷한 수준인 듯하다”며 “당장 내 주머니에 현찰을 꽂아 준다고 하니 당연히 솔깃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건설사들도 마찬가지다. 담당 임원들은 연말 인사철을 앞두고 수주 실적이 다급한 상황이다. 이사비에 따른 뒷감당은 나중 일이다. 대형 건설사의 한 관계자는 “이사비 때문에 건설사는 법인세를 더 내야 하지만 당장 수주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사비 제시 유혹을 떨치기 힘들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