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고미요지, 北 김정은을 말하다] <1> 비밀에 휩싸인 김정은
최근 한반도 정세(외교 안보 등)를 좌지우지하는 핵심인물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라 하겠다. 잇단 탄도미사일 발사와 6차 핵실험, 그리고 섬뜩한 말 폭탄 주고받기로 긴장과 전쟁 위기감을 키우는 두 사람. 이제는 ‘선전포고 주장’까지 나오는 일촉즉발 험악한 형국이다.
트럼프에 맞서는, 30대 초반의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미치광이인가? 전략가인가? 그의 성장 과정과 인성 등을 들여다보고 북한의 과거 현재 미래 전반을 분석·예측해보는 일본 언론인 고미요지(도쿄신문 편집위원)의 원고를 입수했다. 국내 판권을 가진 서교출판사 김정동 사장이 번역서 출간에 앞서 콘텐츠 사용에 대해 양해를 해줬다. 일부 수정을 거쳐 정기적으로 옮겨 싣는다.
* 고미 요지(五味 洋治) :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쥬니치신문 서울지국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중국총국에서 근무하며 북한 뉴스를 쫓아왔다. 올 2월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과 7년 동안 주고받은 전자우편 대화록이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으로 지난 2013년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 도쿄신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60세.
들어가면서
세계 지도자 가운데 북한의 김정은만큼 비밀에 싸여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생년월일도 정식으로 발표된 적이 없지만 1984년 1월 8일 설이 맞다면 아직 30대 초반이다.
김정은은 북한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정일 총서기의 3남으로 직함은 적어도 다섯 개. 북조선노동당위원장, 당중앙위원회정치국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위원장, 국무위원장,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이 그것이다. 결혼해서 아이가 하나 또는 둘.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작년 김정은이 최고 권력자가 된 이후 5년간 340명을 숙청하고,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3억달러를, 김씨 일족의 동상 약 460개 제작에 1억8,000만달러를 사용했다고 분석했다. 더욱이 동 연구원은 작년 분석 결과로 “핵탄두의 소형화 기술이 진전돼 대남공격용 스커드(일본 등을 겨냥한) 노동에 탑재할 수 있는 레벨을 확보했다”고 추정한다.
한국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은 2013년까지는 핵 관련시설의 건설과 무기 개발에 15억달러, 미사일 개발에 17억4,000만달러, 합계 32억4,000만달러를 썼다. 이 가운데 8억4,000만달러가 탄도미사일 개발에, 6억달러가 미사일 발사대 등 건설에, 1억5,000만달러가 연구시설 건설에 사용됐다. 2012년 국방부 추정으로는 탄도미사일 발사관련 비용은 주민 1,900만명의 1년간 식량비에 해당된다.
최고 직책과 권력을 움켜쥔 남자가 핵과 미사일의 개발을 앞세우고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를 요동치게 하고 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자기 나라를 어떻게 바꿔 나가고 있는 걸까. 미 트럼프 정권과의 대립 관계는 호전될 것인가. 한국과 남북관계는 정체된 채 가는 걸까. 중국과의 관계는 이대로 악화하는가. 그리고 그의 모친이 태어난 일본과의 관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날 것인가.
이제 알아야 할 김정은에 관한 모든 것을 가능한 간결하게 정리해보겠다. 우리 각자는 그와 마주 대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책자가 그 출발점이 된다면 다행이다. 나는 일본의 신문사에서 한반도를 전문으로 20년 이상 취재활동을 해왔다. 바다를 사이에 둔 국가의 시점에서 담는데도 유의했고 경칭은 가능한 생략한다. 대통령 등의 직책에는 필요가 없는 한 ‘전대통령’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고미 요지
1. 세계의 세습권력
김정은의 첫 등장
거대한 성냥개비 같은 마이크가 여러 개 늘어선 앞에서 검은 인민복 차림의 한 젊은이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현명한 조선인민군 육해공군과 전략로켓군 장병 여러분...”
다소 빠른 말로 야무진 목소리가 2012년 4월15일 오전 10시15분 평양 김일성광장에 울렸다. 김정은은 2010년 9월 당대표자회에서 첫 공식 등장했는데 그 자리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갑자기 취임했다. 2011년 12월에 김정일이 사망한 뒤 100일간의 상복 기간을 거친 뒤, 북한은 김정은 체제로 권력계승을 진척시켰다.
김정은의 연설이 공개된 것은 이때가 처음. 몸을 앞뒤로 흔들며 말하는 행동거지는 1994년 심장마비로 죽은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을 방불케 한다. 김정은은 좌우 옆머리를 깎아올린 스타일로 김일성을 빼닮았다. 군 최고사령관 취임 후 군 시찰에서는 병사와 팔짱을 끼기도 했는데 이것도 ‘김일성 스타일’이었다.
항일운동 리더였던 김일성은 지금도 북한에서 존경의 대상이다.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물려받은 1990년대 후반은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식량난 시대로, 북한 주민들에게는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선군의 깃발을 높이 들고 최후의 승리를 목표로 강하게 싸우자’라는 제목을 달아놓고 ‘김정은 시대’의 공식개막을 국내외에 선언하는 내용이다.
우선 “군사기술적 우위는 제국주의자의 독점물이 아니며, 적이 원자폭탄으로 우리를 겁주었던 시대는 영원히 지나갔다. 오늘날 장엄한 군사 퍼레이드가 그것을 명백히 실증할 것”이라며 핵과 미사일을 교섭 카드로 한 ‘벼랑끝 외교’ 계승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서기가 활짝 연 자주의 길, 선군의 길, 사회주의의 길을 곧장 나아가려니, 조선혁명의 백년대계 전략이 있고 최종적 승리가 있다. 우리들이 선군조선의 존엄을 만대에 빛나게 해,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위업을 성공리에 달성하려면 하나도 둘도 셋도 인민군을 모든 면에서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며 ‘민족의 존엄과 국가의 자주권’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세를 보였다.
불패의 군사력
아버지 때부터 과제였던 경제재건이 대해서는, “우리들은 김정일 총서기가 뿌린 소중한 씨앗을 훌륭하게 틔워 경제강국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해 개화시켜야 한다. 일심단결과 불패의 군사력에 신세기 산업혁명을 더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사회주의 강성국가”라며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결의를 드러냈다.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진정 통일을 원하고, 민족의 평화번영을 희망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손을 맞잡고 나아가,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실현하기 위해, 책임을 갖고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며 남북대화에 전향적인 표현이 담겼다.
그러나 그후 5년, 김정은은 핵 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되풀이 했다. 전문가 추정에 따르면 총비용은 최대 32억6,000만달러. 한국에서 싹텄던 김정은에 대한 기대는 공포와 적의로 변했다.
한국은 김정은의 목숨을 노리고 ‘특수부대’ 창설을 공표했다. 올해 출범한 미국 트럼프 정권도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며 북한에 대한 무력행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세다. 도대체 이 젊은 권력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세습의 형태
권력을 세습하는 경우 어떤 교육방법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권력자와 경영자는 이런 준비를 한다.
1. 스스로 정치·경제 노하우를 가르쳐 주입한다.
2. 다른 정치가와 회사에서 일하며 수행한다.
3. 일찍이 독립시켜 자력을 붙게 한다.
4. 해외에 유학시켜 견문을 넓힐 수 있다.
5. 국내에 유학시켜 인맥을 붙여준다.
김일성부터 김정일에의 세습은 1에 해당한다. 국가권력의 3대 세습이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김정은의 경우는 1과 4의 혼합형이라 하겠다.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에 유학해 독일어 등을 배웠다. 그리고 귀국 후 김정일은 김정은을 현지지도에 데려가 군과 서민 생활을 함께 확인시켰다.
권력세습은 권력자가 정부와 여당을 만들어 그 후계자가 젊은 경우는 비교적 성공하기 쉽다. 과거의 예가 보여주듯 그것은 지지기반이 튼튼할 뿐만 아니라, 국민도 권력자의 노력을 평가해서 세습을 수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일성·김정일이 정부와 조선노동당을 만들어왔다. 더욱이 김씨 일족의 권위는 정부와 당의 권위를 압도, 세습성공의 조건은 갖춰진 셈이다.
김정은을 떠받치는 북한 엘리트들
북한에서도 아버지 시대를 지탱해온 엘리트들이, 김정은 주변에서 떠받치는 구도가 형성됐다. 예를 들면 작년 6월 28일 설립된, 북한 국가주권의 최고정책지도기관인 국무위원회다. 최근 개최된 13기 최고인민회의 4차 회의에서 헌법개정이 이뤄져, 그때까지의 최고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를 대신하여 국무위가 신설됐다. 군사에 더해 외교·경제 등 국가전체에 책임을 갖는다. 국방위원회 산하 인민무력부·인민보안부·국가안전보위부는 각각 부에서 성으로 개편돼, 국무위원회 산하기관이 됐다.
국무위원장은 북한 최고지도자로 규정돼 있어, 김정은이 취임했다. 국무위 부위원장은 노동당정치국상무위원인 황병서·최용해·박봉주가 임명됐다.
황은 김정일 시대 거의 무명이었지만, 최용해·박봉주는 대대로 김씨 일가를 지탱해온 인물. 당 상무위원장 김영남은 1998년 물러날 때까지 약 15년간 외상으로 재직,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외교정책을 도왔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의 권력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한번 중단된 후계작업
3대째 후계자 옹립작업은 중단과 진전을 반복했다. 집단지도체제와 세습과의 틈새도 요동쳤다. 이제 돌이켜 보면 그것은 김정일 자신의 망설임이 반영된 것이다.
2000년 이후 후계자 선정 움직임이 처음으로 표면화됐는데 형식은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 우상화다. 고용희는 실제로 1998년께부터 김정일의 군부대 등 현지시찰에 동행해 내부적으로는 퍼스트레이디 뿐만 아니라 인민군인들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외부에 유출된 북한인민군 내부 강연자료에서 고용희는 ‘존경하는 어머니’로 불려 우상화하고 있다. 이때 후계자는 차남 김정철. 고용희를 중심으로 조직지도부 1부부장 이제강·이용철과 김정일 측근들이 후계문제를 밀고나갔다.
월간조선이 2003년 “김정철이 3대 세습자가 됐다”고 발 빠르게 보도했다. 그 근거는 조선인민군출판사가 2002년 8월 발간한 조선노동당간부의 사상학습용 자료에 포함된 고용희를 우상화하는 표현이다.
이 자료는 “존경하는 어머니는 경애하는 최고사령관(김정일)에게 충실한 충신 중의 충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관계자가 주목하는 것은 ‘존경하는 어머니’라는 표현. 북한에선 최대급의 경칭으로 우상화하는 경우에 종종 사용된다.
북한은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을 ‘조선의 어머니’로, 김정숙을 ‘혁명의 어머니’라 부른다. 고용희는 세번째 국모가 되는 셈. 고용희가 제주도 출신이기 때문에 북한 내부에서도 제주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일종의 ‘성지’로 여겨졌던 것이다.
제주도 방문 붐
같은 무렵 한국을 방문했던 북한 간부들이 잇달아 제주를 찾았다. 2000년 9월 남북군사당국자회담과 제3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북측 참가자는 제주도의 상징인 한라산에 올랐다.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도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었던 2002년 10월에 북한 경제시찰단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일행은 삼성전자와 현대중공업에 이어 제주도에도 발을 뻗쳤다.
북한 TV에서 12부작 드라마 ‘한라의 메아리’가 2003년 방송된 적이 있다. 제주 해녀가 반일·반미 투쟁을 벌여 마지막엔 평양에 간다는 줄거리. 주인공은 고지니로 고용희와 아주 닮았다.
극성을 보여준 우상화 작업은 2004년에 고용희가 죽은 뒤 김정일의 지시로 중단됐다. 이 때 김정철 옹위에 앞장선 선전선동담당서기 정하철 등이 숙청됐다.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 복귀도 이때다. 정철 후계도 스러져갔다.
여동생 영숙의 망명
정철 후계가 소멸한 열쇠는 용희의 가족이 잇달아 외국으로 망명한 것과 관계가 있다. 우선은 여동생 영숙의 망명.
영숙은 김정은이 1996년부터 2001년 1월까지 스위스 베른에 유학할 때 약 2년간 김정일의 지시로 그를 돌봐줬다. 그런데 주제네바 조선대표부소속 외교관으로 신분을 위장했던 고영숙이 남편 이강과 함께 스위스 미국대사관으로 망명을 타진했다. 미국측은 몰래 고영숙의 신원을 확인한 뒤 둘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망명 동기는 “(북한 내부에 대해)아주 많은 비밀을 알고 있어 두려웠다”는 것.
미 정보당국은 부부 조사를 통해 북한 김씨 일가의 정보를 대량 입수했는데 영숙은 북한 해외자산에 대해서도 증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숙은 미 중앙정보국 ‘증인보호 프로그램’이 적용돼 미국에서 성형수술을 받았고 가명을 사용해 미 정보당국의 보호 속에 생활했다.
망명 사실을 전해들은 고용희는 “(여동생이 가족을 버리고)도망치다니 맙소사! 꼭 찾아내서 반드시 진 빚을 돌려주라”’고 격노했지만, 영숙은 미국의 두터운 보호 아래 있어 손이 미치지 못했다.
영숙이 본 정은
2016년 김정은의 이모 영숙이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를 했다.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뉴욕 어느 마을에 있는 모습이 사진과 함께 소개됐다.
20여년 전에 미국으로 망명한 영숙은 김정은이 1984년에 태어났고, 8살 생일 때부터 권력승계 조짐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정은이 8세 생일에 이미 계급장을 단 장군제복을 선물로 받고 고위 군인들이 그에게 경례를 붙였다고 한다.
영숙과 남편은 정은이 12살 되던 1996년부터 약 2년간, 그의 뒤를 봐줬다. 어릴 적 김정은에 대해 “문제아는 아니었지만 인내심이 없었다”고 회고하고 키가 큰 뒤에는 농구에 몰입했다고 한다.
영숙의 미국 망명은 “역사적으로 강한 지도자 옆에 있는 사람은 의도치 않은 문제에 휘말린다”며 권력투쟁 연루를 두려워한 듯하다. 고영숙와 남편에게는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는데 뜻밖에도 “나중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빠 동훈도 망명
1990년대 초 스위스 주재 북한대사관에 박칠송이란 이름의 외교관이 있었다. 정작 본인은 입을 다물었지만, 1951년에 태어났고 북한 외교관들은 정일의 친족이라고 생각했다. 이 남성이 고경택가 장남 동훈이다.
그는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으로 2000년대 후반에 서유럽 국가에 가족과 함께 망명했다. 미국 정부가 그들이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뉴욕증시에 투자한 김정일 비자금을 동결시켰다.
왜 최고지도자의 가족이 잇달아 망명했을까? 과거에 김정일이 자기 아내에 대해 변덕스러움을 보였기 때문이다. 김씨 일가 비밀을 알고 있으면 언젠가 숙청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영숙의 망명도 숙청 공포 때문이다. 게다가 고용희 가족은 일본 생활을 알고 북한에 갔기 때문에, 사회체제에 대한 의문이 커져 망명 결심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계연기자 kogy21@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