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반전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1960년대 말.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페르미랩·Fermilab) 초대 소장이자 입자 물리학자였던 로버트 윌슨 박사는 미국 원자력위원회로부터 뜻밖의 요구를 받는다. 과격한 학생들이 연구소로 쳐들어왔을 때를 대비한 대응책을 보고서로 제출하라는 것. 보통이라면 연구소 출입 통제 시스템을 강화한다거나 공권력의 도움을 받겠다는 대답이 나왔을 터이지만 윌슨이 준비한 답은 달랐다. “군중이 몰려오면 ‘치명적인 비밀 무기’를 들고 저 혼자 맞겠습니다.” 그가 말한 치명적 무기는 상대방을 위협하는 공격 도구가 아니었다. 군중에 대한 물리학 강의가 전부였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우리가 물리학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면 아무리 난폭한 선동가도 자진해서 해산할 것입니다.”
흥분한 군중을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험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더구나 난해하기로 소문난 물리학 강의로 학생들을 이해시키겠다니 보통의 노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터다. 그럼에도 윌슨 이후 페르미연구소 소장들은 군중을 설득할 강의를 항상 준비한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아무리 위험하고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적대시하거나 책임을 떠넘기기보다 소통으로 해법을 찾겠다는 철학이 있어서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탈원전 정책을 놓고 온 나라가 시끄럽다. 원전을 폐쇄하면 전력수급과 에너지 비용이 문제가 될 것이라는 측과 미래 세대에 위험과 매몰 부담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측의 견해가 팽팽하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프레임까지 덧칠되며 누구도 물러설 수 없는 외나무다리의 대치가 돼버렸다. 이때 정부가 한 수 툭 던졌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결론은 묘했다. ‘중단 결정이 내려졌던 신고리 5·6호기 건설은 재개하되 탈원전 기조는 유지한다.’ 또 한 번 해석을 둘러싸고 잡음이 일어난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에 초점을 맞추는 쪽과 탈원전 기조 유지를 강조하는 측이 다시 싸움박질에 돌입했다.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시도가 또 다른 논란을 불러온 셈이다.
공론화위원회를 폄훼하거나 탈원전의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공론화 전에 정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한 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부 여당의 주장처럼 원전은 국민의 생활과 안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무리 전 정부의 정책이라도 기조를 바꾸려면 먼저 여론 수렴을 거쳐야 한다. 대선 공약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윌슨이 반대를 외치는 학생들 앞으로 의연히 걸어가 물리학 강의를 하겠다고 했듯이 당정도 야당과 국민 앞에 당당히 나서 설득하고 합리적 방안을 모색하는 길을 찾아야 마땅하다. 그 길을 생략하고 국민들이 결정하면 따르겠다며 공론화위원회로 공을 떠넘겼으니 비겁한 변명이자 책임 회피다.
야당이라고 책임에서 비켜날 수는 없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동일본 대지진 때의 쓰나미처럼 자연재해나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관리 소홀로 상상하기 싫은 수준의 재앙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이성적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야당이 원전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는 대안을 내놓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정치의 실종이자 소통의 부재다.
숙의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가 거론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와 정치를 하라는 촛불이 등장한 지 1년이 다 돼가지만 우리의 대의민주주의는 아직도 제자리걸음인 모양이다. 물리학자에도 못 미치는 우리 정치 수준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sko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