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 첫 국산 신약을 선보이며 신약 개발에 도전장을 내민 국내 바이오제약 업계가 글로벌 시장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신약 개발에는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고 성공 가능성도 1% 미만에 불과하지만 독자적인 신약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미래 성장동력을 담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당장 세계 최대 의약품 시장인 미국 진출을 목표로 임상시험에 나선 신약도 10여종에 이른다. SK바이오팜은 뇌전증(간질) 치료제 ‘YKP3089’의 미국 임상 3상을 이르면 연내에 마무리하고 내년 중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허가를 신청할 계획이다. 이 제품은 앞서 4년에 걸쳐 진행한 임상 2상에서 기존 약물보다 두 배가량 약효가 우수한 것으로 나타나 FDA로부터 임상 3상은 안전성 검사만 마치면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시장조사 업체 데이터모니터는 글로벌 뇌전증 치료제 시장이 2014년 49억달러에서 오는 2018년 61억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SK바이오팜은 뇌전증 치료제 신약이 시판되면 미국에서만 연 매출 1조원과 영업이익 5,000억원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코오롱생명과학도 7월 국산 신약 29호에 이름을 올린 퇴행성관절염 치료제 ‘인보사’의 내년 4월 FDA 임상 3상을 앞두고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다. 코오롱이 19년 만에 개발에 성공한 인보사는 동종 세포에서 배양한 유전자 치료제다. 앞서 유럽의약품청(EMA)은 FDA 임상 결과를 유럽 허가에 반영하겠다고 밝혀 이번 임상시험이 인보사의 명운을 가를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 유전자 치료제가 자가면역질환 치료제와 항암제 등으로 출시된 적은 있지만 퇴행성관절염 치료용으로 개발된 것은 인보사가 세계 최초다. 1회 주사로 2년 동안 약효가 유지돼 연 45조원 규모인 글로벌 퇴행성관절염 치료제 시장을 주도할 기대주로 꼽힌다. 코오롱은 인보사의 임상 3상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미국 바이오 자회사 티슈진을 다음달 6일 코스닥에 상장한다.
SK케미칼도 대상포진 백신 ‘스카이조스터’를 앞세워 글로벌 시장 공략에 나선다. 이달 초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판매 허가를 받은 스카이조스터는 SK케미칼이 국내 최초이자 전 세계 두 번째로 개발한 대상포진 백신으로 연구개발 기간만 10여년이 걸렸다. 그간 대상포진 백신 시장은 글로벌 제약사 MSD의 ‘조스타박스’가 전 세계 시장을 독점해왔다.
스카이조스터는 수두 및 대상포진 바이러스를 약독화시킨 생백신이다. 해외 전문 비임상 시험기관에서 엄격하게 안전성을 확보한 후 국내에서 5년 가까이 임상을 진행한 만큼 글로벌 시장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다. 국내 시장은 연간 800억원 규모지만 글로벌 시장은 6억8,500만달러(약 8,000억원)에 달한다.
녹십자도 지난해 국내 최초 성인용 파상풍·디프테리아(Td) 백신으로 허가 받은 ‘티디백신 프리필드’를 조만간 출시한다. Td 백신은 국가 필수 예방접종 백신이지만 전량 외산에 의존해왔다. 일동제약도 지난 5월 식약처로부터 국산 신약 28호로 허가 받은 만성 B형 간염 치료제 ‘베시보’를 다음달 1일 출시하고 글로벌 시장 진출에 도전장을 내밀 계획이다.
바이오벤처기업의 신약 개발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신라젠은 미국·유럽·중국 등 주요 국가에서 면역항암제 ‘펙사벡’의 글로벌 임상 3상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간암 치료제로 임상을 진행하고 있지만 신장암과 대장암 등에도 효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면역항암제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 혁신 신약으로 꼽힌다. 신라젠은 이르면 내년까지 펙사벡의 임상 3상 환자 모집을 완료한 뒤 2019년 말 FDA에 허가를 신청한다는 계획이다.
업종과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개방형 혁신을 도모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전략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JW중외제약의 아토피 피부염 치료 신약 ‘FR-1345’는 최근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의 신규 지원 과제로 선정됐다. 1992년 JW중외제약과 일본 주가이제약이 합작한 바이오벤처기업 C&C신약연구소가 개발했다. 아토피 피부염은 아직 근본적인 치료제가 없지만 새 후보 물질은 염증 생성을 차단하고 가려움까지 억제해주는 효능을 갖췄다.
동아제약은 국내 바이오벤처기업 에이비엘바이오와 손잡고 항체 신약 개발에 나섰다. 차세대 신약 기술로 꼽히는 이중항체 및 접합체 기술을 적용해 항암제와 파킨슨병 치료제를 개발할 계획이다. 동아제약은 바이오의약품 시장 진출을 위해 앞서 일본 메이지세이카제약과 공동 투자해 바이오의약품 전문기업인 디엠바이오를 설립했다. 동화약품은 강스템바이오텍과 줄기세포 화장품 전문기업을 합작사로 설립했다. 연내에 줄기세포 배양액을 함유한 기능성 화장품을 선보인 후 의약품과 의료기기 등으로 영역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국내 바이오제약 기업이 속속 글로벌 수준의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서 과거 ‘국내용’이라는 오명을 벗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며 “지속 가능한 신약 개발 역량을 확보하려면 무리하게 완제품 출시에 도전하기보다 중간 개발 단계에서 기술을 수출하는 것도 훌륭한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