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랭킹 1위 라파엘 나달(스페인)은 지난 2일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파리 마스터스 2회전 뒤 코트를 떠나는 정현(54위·삼성증권 후원)의 등 뒤로 박수를 보냈다. 나달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정현은 훌륭한 선수”라고 치켜세웠다. 정현은 세계 최강을 맞아 0대2(5대7 3대6)로 졌지만 내용은 접전에 가까웠다. 1세트 게임 스코어 2대5까지 끌려가다 5대5로 맞서는 등 나달을 긴장시켰다. 앞선 4월에도 정현은 나달에게 0대2(6대7 2대6)로 진 뒤 “앞으로 좋은 선수가 될 자질을 지녔다”는 칭찬을 들었다.
12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끝난 제1회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 결승. 정현은 나달의 칭찬이 단순한 립 서비스가 아님을 확실하게 증명해냈다. 안드레이 루블레프(37위·러시아)를 3대1(3대4 4대3 4대2 4대2)로 누르고 투어 대회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린 것이다. 이 대회는 전 세계 21세 이하 선수 중 상위 랭커 8명만 출전한 대회로 아시아 출전자는 정현 혼자였다. 그는 루블레프의 강력한 서브에 첫 세트를 내줬지만 이후 날카로운 백핸드 다운더라인과 끈질긴 랠리로 상대의 진을 빼며 백기를 받아냈다.
세트당 4세트, 40대40에서 듀스 미적용 등 테니스 ‘스피드업’을 위한 새 규정을 시험적으로 적용한 이 대회에는 ATP 랭킹 포인트도 걸려있지 않다. 그러나 ATP는 정식 투어 대회 중 하나로 인정했다. 정현은 2003년 1월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투어의 이형택(41) 이후 처음 투어 대회 정상에 오른 한국 선수가 됐다. 14년10개월 만의 경사다. 종전 투어 대회 최고 성적이 지난 5월 BMW 오픈 4강이던 정현은 이번 우승으로 상금 39만달러(약 4억3,000만원)를 챙겼다. 올해 총상금 100만달러도 돌파(104만510달러)했다.
정현은 이번 대회 출전 선수 중 세계랭킹이 다섯 번째에 불과했다. 그러나 톱시드 루블레프를 조별리그와 결승에서 연거푸 격파하며 ‘차세대 넘버원’ 타이틀을 따냈다. 정현이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이긴 데니스 샤포발로프(51위·캐나다)는 메이저대회 US 오픈에서 나달을 꺾고 16강까지 오른 강자다.
정현의 아버지는 삼일공고 테니스부 감독을 지낸 정석진씨다. 또 형은 현대해상 소속 선수인 정홍이다. 테니스 가족의 막내인 그는 고도근시와 난시 치료를 위해 초록색을 많이 보는 테니스를 시작해 지금의 자리까지 달려왔다. 지금도 시력교정용 안경을 쓰고 경기하는 그는 이제 개인 최고 랭킹 경신과 메이저 역대 최고 성적을 향해 다시 뛴다. 개인 최고 랭킹은 지난 9월의 44위이고, 메이저 최고 성적은 올해 프랑스 오픈 32강 진출이다. 이 부문 국내 기록은 이형택의 36위와 메이저 16강 진출이다. 정현은 “우승을 기대하지 못했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를 도와준 스태프와 가족, 팬 여러분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