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의 현실을 깨닫고 자각(自覺)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제 얼굴을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자화상이라도 그려볼라치면 ‘어렵다’ 여기는 것과도 비슷하다. 남의 얼굴은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지만 정작 내 얼굴은 거울이나 카메라 등 비추어진 이미지로만 봐 온 탓인지 언제나 가뭇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셀카(selfie)를 찍는 게 현대인의 일상이라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1915~1982)은 지천명이 된 1964년에 첫 번째 ‘자각상(自刻像)’을 만들었고 1971년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자각상을 남겼다. 뒤러, 렘브란트, 반고흐, 뭉크, 워홀을 비롯해 공재 윤두서 등 자화상을 많이 남긴 작가들의 공통점은 강한 자의식이다. 김종영의 경우 간략하게 그린 크로키까지 합하면 약 100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젊은 시절부터 말년까지, 특히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서는 어김없이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처럼 우선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 바라보고 반성하는 일이 예술활동에서 중요한 덕목이라 여긴 모양이다. 자신을 성찰하고 존재를 확인하며 냉혹한 자기검증을 통해 자각에 이르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대통령은 “40세가 지난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는데, 김종영은 10년 더 묵혀 제 얼굴을 깎았다. 1964년작 ‘자각상’은 덜 다듬어 울룩불룩한 칼질이 세파의 흔적처럼 선명하다. 매사 진지한 눈매와 말을 아끼려 꾹 다문 입이 작가의 평소 성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반면 7년 뒤 제작한 ‘자각상’은 납작하고 간략한 것이 거의 추상조각에 가깝다. 인간적이던 첫 번째 자각상에 비해 관조적이며 초월적인 느낌마저 풍긴다. 현실에서 한발 물러선 듯하다. 나무의 옹이 두 개가 그대로 눈망울이 됐다. 생생한 나무결은 조각가의 나이 든 주름살로 안착했다. 자연과 내가 혼연일치 됐으니 선비정신 충만한 조각가가 꿈을 이룬 셈이다.
조각가 김종영은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라는 말을 자주 했다. 예술가에게 표현은 특권이요 기쁨이지만 사대부 정신과도 상통하는 ‘표현의 절제’는 ‘여백의 미’처럼 할 말은 많아도 아껴두는 몫이다. 표현하지 않았기에 무한한 상상의 가능성이 열렸다. 그럼에도 이 단순한 얼굴에 삐죽 솟은 광대뼈는 김종영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비대칭이라 생동감까지 느껴진다. 여담이지만 1960년대 초반에 숭례문 중건공사가 있었고 이때 상당량의 목재가 나와 이를 서울대와 홍익대 등 미대에 재료로 나눠줬다고 한다. 김종영이 남긴 두 점의 자각상도 당시 숭례문에서 나온 금강송으로 만든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중론이다. 나무의 재질이 뛰어난 데다 세월의 때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두상임에도 뒤통수가 둥글지 않고 머리 뒷부분이 잘린 듯 납작한 이유도 건축 부재를 이용한 까닭이다.
김종영은 1915년 경남 창원의 명문 사대부가에서 태어났다. 가문은 ‘만석꾼’이라 불린 지주 집안이었고 그는 장손이었다. 김종영의 부친은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입신길이 막힌 선비였기에 평생을 고향에서 처사로 지냈다. 그런 아버지는 큰아들 김종영을 다섯 살 때부터 옆에 앉혀놓고 한학과 서예를 가르쳤다. 시골 선비였지만 아버지는 책과 라디오로 신문물을 접했고 김종영도 어깨너머로 이를 배웠다. 서울로 유학 간 김종영은 휘문고보 2학년 때 신문사가 주최한 전조선학생전람회 서예부문에서 전국 장원을 차지했다. 서예의 붓질이 미술로 이어진 것은 의외였다. 당시 휘문고보 미술교사였던 장발(1901~2001) 선생이 석고상을 그린 김종영에게 “조각하는 사람의 그림 같다”며 의식하지 못한 재능을 일깨웠다. 김종영 자신도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의 선입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장르라 여겨 조각을 택했다 한다.
일제강점기 예술인들 대부분이 그랬듯 김종영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유학비를 대 준 고향의 할아버지는 장손이 법학과에 진학하는 줄만 알았다. 중간에서 방패막이가 돼 준 이는 아버지였다. “관리나 법관들은 모두 죄를 짓는데, 내 자식은 짐승으로 치면 제비인지라 남의 곡식 축내지 않고 깨끗이 살 것”이라며 아들의 선택을 허락한 것이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한 할아버지 앞에서 대신 머리를 숙인 것도 아버지였다. 그래서 김종영은 ‘성재’라는 부친의 호에서 성(誠) 자를 가져오고 또 우(又) 자를 붙여 ‘우성’이라는 자호를 지어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되새겼다.
일본 유학을 했지만 김종영의 작품에는 왜색이 없다. 서양 조각가들의 작품집을 사 보며 스스로 제 색을 만든 덕이다. 자신의 작품을 ‘종이인형 같다’고 비꼬는 일본인 지도교수의 핀잔에도 개의치 않았다. 졸업한 후 고향에 머물며 해방을 맞은 김종영은 1946년 새로 생긴 서울대 미술대학의 학장이 된 은사 장발의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할아버지 상중이라 탈상한 1948년부터 서울대 조소과 교수로 재직해 32년간 1세대 조각가들을 키워낸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으로 유명한 김세중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비롯해 전뢰진·송영수·최종태·엄태정·윤명로·심문섭 등 쟁쟁한 조각가들이 모두 그의 제자다.
김종영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영국 국립의 테이트갤러리가 주최한 국제 조각공모전에 출품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로 입상했다. 한국인의 국제 조각전 수상은 최초였다. 당시 심사위원장은 영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헨리 무어였고, 김종영은 동족상잔의 참혹한 시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더했다. 이 수상을 계기로 그는 구체적인 형상을 표현하던 구상조각에서 본격적인 추상조각으로 돌아선다. 대표작인 철제조각 ‘전설’은 문(門)의 형태에 철선과 철편들을 다닥다닥 붙여 분단의 역사를 서정적인 전설로 승화시켰다.
위상이나 실력으로 볼 때 큼직한 조각을 곳곳에 세웠을 만하지만 그가 남긴 대형 기념조각은 1957년 포항에 세운 ‘포항전몰학생 충혼탑’과 1963년 서울 탑골공원에 제작한 ‘3·1독립선언 기념탑’까지 딱 둘 뿐이다. 이들 기념탑에는 여느 기념비들 같은 선동적이거나 역동적인 인물 군상은 없다. 대신 천마총의 ‘천마도’ 혹은 고구려 강서대묘의 ‘기린도’를 닮은 상상의 동물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수호신의 이미지로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 동시에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320점 이상의 대규모 조각이 세워지던 기념비 전성시대였건만 김종영은 정부주도의 ‘애국선열조상 건립위원회’의 전문위원도 사퇴할 정도로 거리를 뒀다. 정형화한 영웅적인 인물상으로 기념비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중 국민 성금으로 제작된 탑골공원의 기념탑은 1979년에 대규모 도시정비사업을 명분으로 무단 철거돼 삼청공원에 천막을 덮어쓴 채 방치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작가는 적잖이 마음 고생을 겪었고 결국 지병이 깊어지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1990년대에 서대문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철거됐다가 복원된 기념조각은 국내에 이 작품이 유일하다.
근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가임에도 불구하고 김종영의 첫 개인전은 회갑전(展)이었다. 앞서 동양화가 월전 장우성과 2인전을 한 게 고작이었고 늦은 첫 개인전마저도 다른 이들 등쌀에 떠밀렸다. 당시 전시도록에서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김종영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생활 주변에 머무르면서 선비다운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가장 고독한 예술가”라며 “청빈한 마음과 고고한 예술적 자세”를 추켜세웠다.
스스로를 ‘불각도인(不刻道人)’이라고 한 김종영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며 재료의 본성을 최대한 살리되 인공의 손길을 최소화하는 ‘불각의 미’를 강조했다. 작고 20주기이던 2002년 종로구 평창동에 개관한 김종영미술관 본관도 이를 따 ‘불각재’라 불린다. 미술관 입구의 키 큰 소나무가 나뭇결 생생한 자각상의 김종영과 몹시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