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금융정책

[1997 환란 그후 20년] 금리서 인사까지...투박한 '정부 입김'이 민간 자생력 갉아먹어

<2부> ③관치에 멍드는 시장

대출금리·카드수수료·금융권 인사 등 노골적 개입

실적악화·감원·눈치보기 등 시장 위축·왜곡 심화

"관치 넘어 관제경제로 악화...국가경쟁력 발목잡아"





“재벌 혼내 주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지난 2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확대경제관계장관회의에 지각 도착하며 말한 내용이다. 김 위원장은 교수 시절 관치경제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 왔지만 이날 발언으로 칼자루를 쥔 공정위원장에 오른 뒤로는 재벌을 ‘혼내 줄 대상’으로 바라보며 스스로 관치의 틀에 빠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뿌리 깊은 관치가 환란 20년이 지난 현재도 진보정권·보수정권을 막론하고 여전히 진행형이다. 특히 시장에 맡겨야 할 상품가격이나 금리, 심지어 시중은행 경영진과 민간협회장 선출까지 청와대와 정치권, 정부 등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 규제라는 보이지 않는 무기를 앞세워 정부가 관치를 정당화하다 보니 시장은 저항할 힘도 갖추지 못하고 위축되거나 눈치만 보는 등 왜곡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과도한 관치가 시장을 왜곡하는 사례는 이미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최저임금 인상이다. 최저임금위원회는 내년도 인상률을 과거의 두 배 수준인 16.4%로 결정했다. 사용자와 노동자 측 대표자가 결정했다고 하지만 사실상 정부가 상승률을 정해두고 논의를 이끌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부담이 가중되는 중소기업 등의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예산 3조원을 투입해 ‘세금으로 민간기업의 인건비를 지원’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규제산업인 금융에는 관치가 더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는 물론 법정 최고 금리 인하, 실손보험료 인하 등에 정부가 드러내놓고 개입하고 있는 게 단적인 예다. 대통령 공약사항이라는 이유로 시장금리나 가격에 개입하면서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지만 정부 개입정책에는 변화가 없다. 법정 최고 금리를 인하하게 되면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 등은 조달금리 등을 감안해도 수익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중·저신용자에 대한 대출을 중단하거나 일부 대부업체처럼 아예 폐업에 나서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저신용자를 불법사채 시장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하는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카드사들의 실적악화는 현실화되고 있다.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로 카드사들은 이미 올 3·4분기 당기순이익이 전년 대비 20% 가까이 감소하는 등 경영에 비상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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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부 통제가 강한)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도 이렇게는 안 한다”며 “예전에는 관치경제라고 했는데 지금은 관제경제 수준까지 나아간 것 같다”고 지적했다. 20년 전 관치경제를 넘어 이제는 아예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정부 개입이 당연시되는 경직된 ‘관제경제’로까지 악화됐다는 경고다.

관치로 시장의 경쟁원리가 무너지면 시장 왜곡은 시간문제라는 지적이다. 한 예로 수수료 인하 등으로 실적이 악화된 카드사들은 이미 인건비 축소 등을 위해 감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카드업계 고위 관계자는 “주주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최고경영자(CEO) 입장에서는 어떻게 든 실적을 맞추려 할 것”이라며 “궁극에는 인건비 부담을 줄이는 감원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영세 자영업자를 돕기 위해 가맹점 수수료를 낮췄다고는 하지만 시장과 역행하는 일방적인 관치로 일자리를 줄이는 ‘감원 부메랑’의 역설만 남게 되는 것이다.

금융위 내부에서는 “은행들이 예전처럼 정부의 말을 듣는 줄 아느냐”고 항변하지만 금융회사들에서는 오히려 과거보다 투박한 정부개입이 더 문제라는 하소연도 나오고 있다. 지난달 금리 인상 기대감에 따라 주택담보대출금리가 오를 조짐을 보이자 김용범 금융위 부위원장이 은행 부행장들을 소집해 “과도한 금리 인상을 집중 점검해 엄단할 것”이라며 구두경고를 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화들짝 놀란 은행들은 바로 가산금리를 내리는 식으로 즉각 반응했다. 당국은 퍼포먼스가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외국투자자 등은 노골적인 관치에 더 놀랐다는 지적이다. 전직 금감원장은 사석에서 “관치라고 다 나쁜 게 아니라 투박하게 (개입)하는 게 진짜 문제”라며 “시장 자율에 맡기되 모니터링을 하다가 문제가 커질 조짐이 보이면 그때 조용히 개입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부처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경우에는 관치가 더 노골적으로 이뤄지는 것도 문제다. 최근 금융감독원의 채용비리 문제가 불거지자 기재부가 금감원의 예산을 직접 통제하겠다고 나서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가 금감원을 통해 민간 금융회사를 우회적으로 통제하겠다는 것인데 최종구 금융위원장과 최흥식 금감원장이 동시에 반대하면서 부처 간 갈등 조짐을 보이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블록체인이나 핀테크 같은 신기술 등 소위 막 뜨는 산업에 대해서는 유관부처들이 신속하게 규제에 나서고 있다. 규제를 통해 관련 산업을 누가 먼저 ‘찜하느냐’에 따라 자리나 인력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부처 간 선점 경쟁이 ‘관치규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금융공기업은 말할 것도 없이 무역협회 등 민간협회나 시중은행에도 ‘자리’를 위한 관치개입이 과거 못지않게 노골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은행의 한 사외이사는 “정부가 행장 선임 과정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선언한 적이 없지 않느냐”며 “민영화된 은행까지 정부가 개입하려고 하면 해외 투자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말했다.

반면 적극적인 관치를 통해 구조조정이 필요한 조선·해운 구조조정에는 오히려 정부가 개입을 망설이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구조조정도 시장 위주로 흘러가는 게 맞지만 지금과 같은 비상사태의 경우 정부가 개입을 통해 큰 그림을 그려줘야 하는데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이 생기면 “관치는 안 된다”며 한발 빼고 있다. 결국 관료들이 자신들의 유불리만 따지면서 관치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이 왜곡될 대로 왜곡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일부에서는 지난 수십년간 ‘변양호 신드롬’을 겪었던 관료사회에 이제는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규제부터 하고 보는 식의 보신주의만 판쳐 대한민국 경쟁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서일범·임진혁기자 squiz@sedaily.com

서일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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