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칼럼] 우리는 왜 '옥비의 난'에서 교훈을 얻지 않는가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1583년 1월 여진족인 니탕개는 경원과 종성 일대의 번호(조선에 귀화한 여진족)들을 규합하고 1만명이 넘는 여진 기병을 이끌고 조선의 국경을 넘나들며, 근 6개월 동안 함경도 지방을 휘젓고 다니면서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 난은 우을지라는 번호가 부패한 함경도 관리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아산보의 관아를 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그 후 조선의 조정에서 이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해 토벌하려고 들자 겁을 먹은 번호들이 국경너머 동족에게 군사를 요청하면서 폭동이 전쟁으로 번지고 말았다.

이때의 국제정세를 보면 조선은 신분제의 병폐로 경제가 파탄되고 국고가 텅비었지만, 계급적 특권을 고집하는 양반들이 당파를 형성하여 변법(變法)을 거부하느라 당파싸움만 일삼는 바람에 온 나라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명은 밖으로 북로남왜의 외침에 시달리고, 안으로 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외국에서 온 사절단의 안위조차 지키기 힘들었지만 황제는 황음에 빠져 채찍으로 환관이나 궁녀를 때려죽이는 놀이를 그치지 않았으니 나라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조선 및 명과 국경을 맞댄 여진족이 발호하고 하루가 다르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관리들은 국제정세에 무지한데다 이기적 특권유지에만 신경을 쓰느라 북방 이민족의 준동을 보고받고도 나몰라라 했다. 이 때문에 니탕개의 난 때 경원과 종성 일대의 관아는 무방비로 공격을 당해 창고의 무기나 곡식은 물론 붓이나 벼루까지 깡그리 약탈을 당했으며, 가족이나 가축을 지키려다 미처 피하지 못한 백성들은 무참하게 살육을 당해 백성들의 피가 내를 이룰 정도였다.

이런 참극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변화를 꾀하기 보다는 오히려 신분제도의 강화를 위해 옥비의 후손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대대적 노비쇄환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 노비쇄환령의 연유를 이해하려면 150년 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50년 전 세종조 때 조정은 북방의 여진족을 아우르고, 국경지역에 사군육진(四郡六鎭)이라는 10개의 교역 겸 군사도시를 건설했다. 그런데 그 때 사군육진을 건설한 힘은 군사력이 아니라 백성들의 자유를 향한 염원과 땀이었다. 당시 조정은 사군육진의 인구확충을 위해 남도의 백성들을 북방의 국경도시로 이주시켰는데, 이 때 이주한 사람들은 국가의 강제가 아니라 모두 자발적으로 지원한 백성들이었다. 북방의 국경도시로 이주할 경우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조정의 약속을 믿고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것이다. 그들은 국경지대의 둔전병이 돼 평시에는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주저없이 농기구 대신 창검을 손에 쥐었다. 겉으로 보기에 고달픈 삶이었지만 노비신분을 벗고 자유를 가졌다는 해방감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했다. 딴 곳에 팔려갈 걱정없이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기에 이민족의 침입쯤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30년도 지나지 않아 갑자기 국가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선왕(예종)이 재위 10개월 만에 석연찮은 죽음을 맞은 바로 그날 대비(정희왕후)와 권신들의 추대로 왕위계승권이 한참 뒤처지는 12세의 어린 왕자(자을산군)가 왕(성종)으로 등극했다. 그렇게 되자 권력은 대비(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통해 저절로 한명회, 신숙주 등의 조정권신의 손에 들어갔다.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권신들은 가산을 늘리기 위해 노비수를 대폭 늘리고 싶었다. 그래서 선대 왕의 유지나 업적마저 부정하고, ‘전조의 폐단을 바로 잡는다’는 명목으로 과거 자유를 찾아 북방으로 이주했던 백성들의 자유와 권리를 몽땅 소급해서 박탈하고 다시 노비로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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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하루아침에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떨어진 백성의 수가 10만이 넘었고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런 와중에 옥비의 부모는 딸자식만큼은 노비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평생 모은 재물(어차피 노비가 되면 한 푼의 재산도 소유할 수 없게 된다)과 딸을 국경지역에 파견 나온 한 군관에게 넘겨주고 척박한 땅을 벗어나게 했다. 이런 부모의 헌신 때문인지 옥비는 양민의 아내로서 평생을 살면서 열이 넘는 자식을 뒀다. 후손들도 번창해 옥비의 사후 80여 동안 500명이 넘는 후손을 두었는데, 그 중에는 고관대작이나 왕가의 인척도 있었다.

그런데 니탕개의 난이 발생한지 두세 달 후 옥비의 도주사건이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그러자 조정대신들은 ‘건장한 노비를 면천해 군사로 등용하자’는 병조판서 이율곡의 주장을 물 먹이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어수선한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전국의 관아에 대대적인 노비쇄환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헌부와 한성부, 포도청은 물론 전국 8도의 지방관아에 실적경쟁을 시켰다. 그 결과 수천에 이르는 양민이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노비로 떨어져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북방의 국경지대로 끌려갔다.

결과도 그렇지만 노비쇄환을 위한 재판과정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불문곡직 관아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과 함께 죽은 조상이 노비였다는 사실을 자복하라는 추궁을 받다보니 일단 맞아 죽지 않으려면 허위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 선량하고 힘없는 백성들이었지만, 권력싸움에서 패배하거나 권력자에게 찍힌 양반이나 왕족도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해 민심은 얼어붙고, 나라는 더 기울었다. 양반들도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사건의 초기에는 벼슬아치들이 사건을 처결할 경차관의 임무를 맡지 않으려고 서로 피했다. 처음 경차관을 맡은 자는 양심에 찔려 처결을 미룬 채 시간을 끌며 행여나 어명이 바뀌기를 기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집안의 상을 핑계로 사직해 버렸다. 그 후 등을 떠밀리다시피 경차관을 맡은 자는 부임행차를 앞두고 갑자기 중병에 걸렸다며 자리에 누워 버렸다.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심사숙고 끝에 사명감이 넘치고 유능한 인물을 다시 경차관으로 임명했다. 과연 이 인물은 조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가차 없는 고문으로 쉽사리 죄인들의 자백을 받아내고, 속전속결로 처결을 내렸다. 그렇지만 이렇게 북방의 국경지대로 끌려간 사람들이 과연 국방의 강화에 도움이 되기나 했을까? 이 사건으로 가장 큰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은 이는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 선생이었다. 그는 이 사건이 있기 10년 전부터 ‘건장한 노비의 면천과 군사등용을 통한 군사력을 증강’을 목청이 터지도록 주창했지만 자신의 뜻과는 정반대로 계급사회의 동요를 우려한 양반들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해 수많은 백성들이 옥사로 희생되는 참극을 목격하고,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노비쇄환이 마무리될 무렵 모든 벼슬에서 물러났고, 그로부터 석 달 후 49세의 나이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과거나 지금이나 왜 우리는 1583년에 연속해 일어난 엄청난 국가적 재난을 역사에 묻어둔 채 교훈을 얻지 않는가? 역사를 독점하면서 과오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권력의 편협함 때문인가?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수천의 백성이 외적의 손에 죽거나 다치고, 수천의 양민이 하루아침에 노비가 돼 북방 국경지대로 끌려가는 사건이 어떻게 역사 속에 묻힐 수 있단 말인가? 그 때 조선의 양반들에게 백성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때의 국난으로 교훈을 얻었다면, 불과 수년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같은 과대망상병자 따위가 감히 조선을 침공하는 사건도 역사의 기록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조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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