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신만이 나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짐바브웨를 37년간 통치해온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사임 의사를 밝히며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군부가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킨 지 엿새 만이며 의회가 탄핵절차에 돌입한 지 하루 만이다. 짐바브웨 정치·경제 상황을 최악으로 만든 독재자의 몰락으로 국민들 사이에서는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유력한 차기 권력자로 거론되는 에머슨 음난가그와 전 부통령 역시 권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잔인성으로 악명이 높아 정치적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제이컵 무덴다 짐바브웨 의회 의장은 이날 오후 무가베 대통령으로부터 사임서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사임서에서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즉각적이고 자발적으로 사퇴한다”고 밝혔다.
앞서 집권당인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애국전선(ZANU-PF)’은 야당과 함께 의회에서 탄핵 안건을 발의한 바 있다. 지난 1980년 56세 때 초대 총리에 오른 뒤 37년간 장기집권한 세계 최고령 지도자 무가베는 41세 연하 부인 그레이스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는 ‘부부세습’을 시도했다가 역풍을 맞아 탄핵 위기를 자초했다.
무가베의 몰락으로 짐바브웨 통치는 6일 갑작스럽게 숙청됐다가 정변 후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음난가그와 전 부통령이 맡게 됐다. 짐바브웨 국영방송은 22일 “음난가그와가 24일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최근 집권당 새 대표로 추대된 음난가그와는 쿠데타를 이끈 군부의 지지도 받고 있어 권력 공백기에 임시 지도자로서 권한을 행사하다 내년 대선에 공식 출마할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외신들은 음난가그와의 집권을 무가베 정권의 2막으로 해석하며 짐바브웨가 또 다른 독재자를 맞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무가베의 혁명동지로 이름을 알린 그는 무가베 못지않은 적폐 정치인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는 1980년대 소수부족 은데벨레족 학살과 2008년 대규모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특히 별칭이 ‘악어’일만큼 무자비하고 과격한 성격으로 짐바브웨 국민 사이에서는 무가베에 이어 두 번째로 두려워하는 인물로 꼽혀왔다. 조니 카슨 전 짐바브웨 미국대사는 PBS와의 인터뷰에서 “무가베보다 20세 아래인 음난가그와는 사실상 무가베 주니어이자 복제품(clone)”이라며 “무가베 집권기와 같은 정치적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다만 음난가그와는 집권당에서 ‘경제통’으로 알려져 최악의 상황인 짐바브웨 경제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무가베보다 야권 인사와의 협치에 더 열려 있다는 점도 긍정적 요인으로 거론된다. 맬컴 리프킨드 전 영국 외무장관은 “음난가그와는 무가베보다 실용적인 사람”이라며 “짐바브웨 경제가 엉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그의 대권이 현실화된다면 개선점이 나올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짐바브웨는 1967년 영국에서 독립했을 당시만 해도 아프리카 나라 중 의식주가 가장 양호한 나라로 꼽혔지만 1980년 무가베 집권 이후 37년에 걸쳐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1,100달러로 북한과 비슷한 수준이며 1980년 14.42%에 달했던 GDP 성장률도 2003년 -17%로 주저앉은 뒤 부진을 거듭해 지난해 0.69%를 기록했다. 특히 정치혼란과 지폐 남발 등으로 천문학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자국 통화는 아예 유통되지도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