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23년 일본 도쿄·요코하마 등에 발생한 리히터 규모 7.9의 강진인 관동대지진. 건물이 무너지고 마침 점심준비로 불을 때다가 대화재가 발생한다. 해안가에는 지진해일(쓰나미)이 밀어닥친다. 강한 진동으로 흙탕물이나 모래가 솟아오르는 ‘액상화’ 현상도 심해 분출된 지하수를 불 끄는 데 사용했다. 아수라장 속에 무려 14만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계엄령을 내린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독을 우물에 타고 불을 지르고 약탈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자경단·경찰·군을 동원해 6,000~2만명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올해 영화 ‘박열’의 소재가 되며 일반에도 많이 알려졌지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조선인 학살에 관여한 적 없다”며 사과를 거부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를 속여 끌고 가는 데 “일본 정부나 군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아베 신조 정권이 오리발을 내미는 식이다.
일본은 1964년 니가타지진에 이어 1995년 고베대지진, 2011년 동일본대지진까지 액상화 현상과 함께 쓰나미가 몰아닥쳐 피해가 배가됐다. 동일본대지진은 9.0에 근접할 정도로 관측 이래 가장 큰 강진이었는데 2만명 가까이 숨지거나 실종되고 100만채 이상의 주택이 파손된다. 무시무시한 쓰나미가 몰려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파괴되며 초유의 방사성물질 유출사고도 발생한다. 1986년 소련(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참사 수준으로 현재까지도 피해가 만만치 않다.
기상청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따르면 동일본대지진은 지난해 9월 경주지진에 이어 최근 포항지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단층이 서서히 뒤틀리며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나라가 환태평양 ‘불의 고리’에 사실상 편입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기상청이 2012년 펴낸 ‘한반도 역사 지진기록’에 2,161번의 지진(서기 2년~1904년)이 있는 것을 보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역사를 꼼꼼히 기록했던 조선이 1,500건인 것을 보면 기원전 2,333년 고조선 개국부터 따지면 1만3,000번가량 지진이 난 것으로 추정된다. 오죽했으면 세종대왕이 “우리나라에 지진이 없는 해가 없고 경상도에 더욱 많다”고 했을까.
액상화 현상과 지진해일도 여러 번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304년 지진이 났는데 샘물이 솟구쳤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97년 함경도의 인차외보 동쪽 5리쯤 붉은빛의 흙탕물이 솟아오르다가 며칠 만에 그쳤다”고 돼 있다.
1643년 경상도에서 몇달간 발생한 대지진에서도 액상화 현상이 일어난다. ‘승정원일기’에는 “(합천) 초계에서 진동하다가 마른 하천에서 탁한 물이 나왔다. 변괴하다”고 기록됐다. ‘조선왕조실록’은 “대구·안동·김해·영덕 등에서 성첩이 많이 무너지고 울산부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쳐 나왔다. 한양과 전라도까지 전국적으로 지진이 발생했다”고 증언한다. ‘승정원일기’는 울산에서 물이 솟아난 곳에 한 두(斗는 한 말. 열 되로 8kg)씩의 모래가 쌓였다고 부연한다.
지진해일 기록도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은 “1681년 강원도 양양에서 바닷물이 요동쳤는데 마치 소리가 물이 끓는 것 같았다”고 표현한다. 수도에 지진피해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779년 신라 경주에서 지진이 나 집이 무너지고 100명 넘게 숨졌으며(삼국사기), 1311년 개경 왕궁이 지진피해를 당했다(고려사)고 쓰여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518년 한양 지진 당시 “도성 사람들이 밤새 노숙했다”고 해 수도권이 지진 무풍지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지진은 정치적으로도 해석됐다. 중종은 1518년 대지진 당시 “지진으로 인한 어려움을 이기려면 소인을 멀리해야 한다”는 조광조의 개혁 요청을 받아들였다가 훈구파가 “대지진은 조광조 등이 하늘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이라고 강력히 반발하자 결국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대거 숙청했다. /고광본선임기자 kbg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