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이연희와 ‘더 패키지’(극본 천성일, 연출 전창근) 종영 인터뷰를 나눴다. 프랑스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 이날 인터뷰는 여행이 안겨준 성장까지 폭 넓은 주제로 이뤄졌다.
‘더 패키지’는 각기 다른 이유로 여행을 선택한 사람들이 서로 관여하고 싶지 않아도 관계를 맺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과 소통의 여정을 그린 드라마. 이연희는 극 중 프랑스 패키지여행 가이드 윤소소 역을 맡아 여행객들을 이끌었다. 그러면서 문제적 여행객 산마루(정용화 분)와 운명적인 사랑까지 나눴다.
대부분의 배우가 그렇겠지만, 이연희는 특히 이번 작품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촬영장소가 프랑스라는 것, 극 중 직업이 가이드라는 것이 그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이연희와 프랑스의 인연은 26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리로 처음 혼자 배낭여행을 떠난 그는 프랑스에서 패키지여행 가이드들과 인연을 맺었다.
“하루 당일치기 벨기에 투어를 소개받았는데 정말 좋았다. 가이드의 열정이 정말 대단했다. 네 시간동안 본인이 운전하면서 직접 설명도 해주고, 물어보면 모르는 게 없이 다 대답해주고. 제가 와인을 좋아하는데 와인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더라. 그런 모습에 반했다. 인연이 닿아서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다.”
배우인지라 자연스럽게 나중에 가이드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런데 운명처럼 가이드를 다룬 드라마 대본이 이연희에게 들어왔다. 알고 지낸 가이드 언니 오빠들에게 누구보다 먼저 알려주고 싶었을 터. 운명은 여기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천성일 작가와 연락을 주고받던 가이드들이 바로 이연희가 아는 그들이었다.
“가이드 오빠가 패키지 투어를 도는 중에 어떤 분이 주차할 공간을 물어서 대답해 줬다더라. 알고 보니 그 분이 천 작가님이셨던 거다. 간단한 멘트를 받던 것에서 시작해 여행사와도 연결이 됐다. 우리끼리 ‘소름’이라면서 놀라워했다. 그러니 저에게는 완전 운명이다. 꿈이 이뤄진 작품이다.”
이연희는 “4년 만에 제가 그려온 시나리오가 들어온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자연히 작품에 애정이 샘솟을 수밖에.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 꽤 긴 기간을 기다리며 한 번 더 패키지 투어를 돌았다. 이번에는 진짜 가이드 역할을 앞두고 연구를 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준비 기간이야 너무나 행복했지만 막상 가이드 연기가 쉽지만은 않았다고.
“가이드가 하는 이야기에 여행객들이 잘 호응을 안 해준다. 사실 여행 갔을 때 가이드의 말에 대답하기 부끄럽지 않나. 여행객이 아니라 가이드 입장이 되니까 알겠더라. 그러다가 마지막이 돼서야 호응을 해주니 서운하다는 감정도 들었다. 가이드 오빠에게 고충을 이야기했더니 ‘너 가이드 다 됐구나’라는 반응이 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서 프랑스에 처음 온 박유나(나현 역)가 에펠탑을 보면서 ‘우와~’ 하는데 본인의 기분이 좋았다고 설명했다. ‘가이드 마인드’에 완벽히 빙의한 것이었다. 배우들이 쉬는 날에 질문하면 차마 모르겠다는 대답을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정규수(오갑수 역)는 촬영이 없는 날에도 이연희를 ‘가이드 언니’라고 불렀다. 촬영장 분위기가 훈훈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객들의 소극적인 호응 외에도 물론 힘든 점은 있었다. 가이드의 숙명, 길고 긴 대사였다.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프랑스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물론, 프랑스어까지 능숙하게 해내야했다. 이번 드라마를 통해 불어를 본격적으로 배웠고 대사는 그야말로 ‘달달달’ 외웠단다.
“가이드 대사를 계속 연습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어투가 생기더라. 영화도 찾아보고 직접 투어도 다니면서 대사를 이해하려 했다. 몽생미셸에서 대천사 미카엘을 설명하는 부분이 가장 길었는데 너무 떨렸다. 더 곱씹었더니 기억에도 남고 후회도 된다. 더 여유로웠으면 싶어서 가이드 오빠에게 이야기하니 그분들도 첫 멘트가 가장 힘들다더라.”
그렇다고 ‘더 패키지’에서 볼 수 있는 이연희의 모습이 오직 가이드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이연희는 윤소소 그 자체가 돼서 정용화와 멜로 호흡도 선보였다. 사랑에 상처받아 까칠하면서도 산마루와 묘한 눈빛을 나누는 지점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인생캐릭터’라는 평이 나왔을 정도. 이에 대해 “손꼽을만한 작품인데 좋게 봐주시니 정말 기분이 좋다”고 소감을 말했다.
‘더 패키지’는 12부작 드라마. 일반적인 미니시리즈와 비교할 때 다소 짧은 길이다. 이연희는 이마저도 “여운이 남아 좋았다”고 표현했다. 만약 시즌2 제의가 온다면 그 또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기에는 작품 전반에 깔린 ‘공감의 정서’가 큰 몫을 했다. 자신이 맡은 역할 뿐만 아니라 다른 출연자의 대사도 곱씹을 만했다.
“각자 생각하기에 중요하게 여기는 신을 촬영할 때는 서로 응원도 해줬다. 공감할 수 있는 대사가 정말 많았다. 우리 모두 내린 결론은 천 작가님이 천재라는 거다. 어쩜 이렇게 멜로를 잘 쓰셨지 싶었다.”
이처럼 작품으로서 훌륭했던 ‘더 패키지’는 이연희가 배우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성장하는데도 충분한 디딤돌이 됐다. 극 중에서 가이드로서 여행객들을 이끄는 것처럼 실제 촬영 현장에서도 그는 배우들을 통솔하기 위해 노력했다. 관광지라 분위기가 어수선해질 때마다 주변 배우들에게 말을 걸고 이끌었다고.
“이번 기회를 통해 리더십을 배웠다. 예전에는 말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말을 많이 하다보니까 사람을 대하는 법도 알게 되더라. 예민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즐길 수 있게 됐다. 정말 정신이 없어도 웃고 떠들더라(웃음). 또 인연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운명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느덧 데뷔 16년차, 그리고 30대에 접어든 이연희다. ‘더 패키지’를 통해 이전 작품보다 더 많고 큰 깨달음을 얻은 그는 앞으로 어떤 배우의 길을 걷고 싶을까. 이전에는 매력적인 인물에 무작정 마음이 끌렸다면 이제는 공감이 가는 시나리오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고. 본인이 이해하고 공감해야 시청자도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지금껏 달려오기만 했다. 어느 순간 완전히 지쳤다. 내가 앞으로 배우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했다. ‘더 패키지’ 들어가기 전에 나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배우라는 직업이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몇 년을 하고 있다는 건 운명의 직업이기 때문이라는 생각한다. 그래도 즐겁게 하고 있지 않나. 그게 감사함이 되고 책임감도 생겼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다.”
/서경스타 양지연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