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경제·마켓

[시각]진정한 적폐 청산

김희원 국제부 차장



개를 키운다는 이유로 “냄새가 난다”며 간헐적으로 인터폰을 울려대던 윗집 주민이 새벽 3시48분 잠든 나와 반려견을 깨웠다. 소송을 준비하던 중 ‘자칫 멍멍이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 급작스럽게 이사를 결정했다.

양 전셋집의 입주 날짜가 꽤 차이 났지만 고민할 것은 없다고 했다. 실제로 전세자금대출을 일부 활용하니 살던 집을 두고도 편히 이사할 수 있었다. 명색이 18년 차 경제지 기자가 지금껏 이를 이론적으로만 인지했다는 자괴감보다 ‘전세자금의 80%’라는 대출 한도가 새삼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70~80%가 빚이라면 원금 상환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인데 이런 비정상적인 대출 제도가 어떻게 존재한다는 말인가.


고민은 이사 후 시작됐다. 주위 모두가 대출 청산을 말렸다. 이전 집이 급등락 우려가 적은 소형 역세권 아파트이니 매입해 월세를 놓으라고들 했다. 알토란 같은 월세에 비해 이자는 푼돈이었다. “그렇게 시작해 불리는 것”이라고 작은 월세 아파트 두 채를 마련해 올해 은퇴한 친구가 조언했다.

현 정부의 적폐 청산은 전 정권과 기업인이라는 두 축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전 국민이 바라는 진정한 적폐 청산은 평생 일해도 집 한 채 갖기 어려워진 불합리한 주택시장 구조와 부모의 부가 자녀의 학벌로 직결되는 교육 계층이동 사다리의 붕괴가 아닐까 한다. 대출 규제강화가 답이 아니라 빚 없이도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다시 구축할 수 있을 때 적폐청산이 온다는 얘기다.


돌이켜보면 이명박 정부는 빚을 내 집을 사라고 권했고 박근혜 정부는 빚을 내 전셋집을 얻으라고 했다. 글로벌 부동산 대세 상승기에 부푼 집값은 다른 나라에서는 가격 하락과 대출 구조조정을 거쳐 정상화됐지만 우리는 기회를 놓쳤다. 남은 것은 국내총생산(GDP)의 96%에 육박하는 천문학적 가계부채와 ‘희망을 잃은 나라’라는 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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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역시 표류하기는 마찬가지다. 투기 세력만을 막겠다는 정책은 결국 부푼 집값을 용인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돼 역풍을 부를 뿐 집값을 잡기는 힘들다. 매매가를 뛰어넘는 전셋값이 말하는 ‘민의’도 반영할 수 없다.

누구도 자신의 집값이 하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웬만한 부유층들도 자녀가 결혼한 뒤에는 집을 줄이는 것을 보면 집값이 높아 행복한 계층은 ‘갭 투자’가 다수인 집 두 채부터가 아니라 세 채 이상 가진 사람들부터인 듯하다. 최근 나온 통계청 주택소유 통계에 따르면 이들은 주택 소유자의 3.1%다.

국민을 설득하고 합리적인 대출 구조조정 등으로 집값의 선순환을 이뤄내는 적폐 수술은 일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촛불 민의’와 국민적 동의가 살아 있는 정권 초창기가 아니고는 힘들 것이다.

금리 인상 시대가 열리면서 돈 파티가 끝났다고 말한다. ‘서울 집값마저 올린 정권’이 될 작금의 현실 앞에서 한 번 더 희망을 말해도 될까. 우리에게 영영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heewk@sedaily.com

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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