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Science&Market]가장 오래된 미래기술

이성일 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

청동기·철기시대 연 뿌리산업

첨단지식산업에도 뼈와 살 공급

굴뚝산업 이미지 벗고 청년 유입

4차 혁명의 근간 튼튼히 해야

이성일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원장


자동차 엔진의 핵심 부품으로 꼽는 것이 피스톤이다. 엔진 심장부에 위치하면서 실린더 속을 왕복 운동하며 연료의 폭발력을 커넥팅 로드로 전달해 크랭크샤프트를 구동시킨다. 이 분야의 1위 기업은 동양피스톤이다. 국내 시장 점유율이 50%를 웃돈다. GM·미쓰비시·아우디·BMW에도 엔진 피스톤을 납품하며 글로벌 경쟁력 4위에 올라 있다. 지난 2014년 7월에는 ‘월드클래스(WC) 300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WC 300은 정부가 성장 잠재력이 있는 중소·중견기업을 집중 지원해 오는 2020년까지 세계적 기업 300개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시동을 걸었다. 동양피스톤을 비롯해 46개의 뿌리기업이 WC 300 기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지금까지 선정된 266개 기업의 17.3%에 해당하는 수치다. 전체 제조기업의 6.4%에 불과한 뿌리기업 수를 고려하면 비중은 더 높아진다. 3D 산업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는 뿌리산업 분야에서 오히려 다수의 히든챔피언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주조·금형·소성가공·용접접합·표면처리·열처리의 6대 공정기술을 가리키는 뿌리기술은 제조 공정 전 과정에 두루 적용돼 최종 제품의 기능과 강도·정밀도를 결정한다. 자동차·조선·휴대폰 등 국가 주력산업의 성장을 뒷받침했고 반도체·로봇·우주항공 등의 첨단산업에 뼈와 살을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뿌리산업이 굴뚝산업의 이미지를 씻고 더 많은 히든챔피언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기업의 영세성, 젊은 인력의 기피 현상, 환경문제 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특히 숙련기술자는 고령화되는데 청년기술자는 유입되지 않고 있어 오랜 시간 축적돼온 기술의 맥이 끊기기도 한다. 연구 인력도 부족해 신기술 개발이 더디고 이 때문에 급변하는 제조 환경의 변화에 밀려날 것을 두려워하는 뿌리기업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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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도 2020년 세계 뿌리산업 시장의 규모는 약 2,500조원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제조혁신으로 수요산업이 변화하고 대체기술이 부상하고 있음에도 뿌리산업의 쓰임새와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개발 경쟁이 가열되고 있는 폴더블폰만 하더라도 소재와 부품이 따라주지 않으면 상용화가 어렵다. 마음대로 접었다 펼 수 있는 스마트폰을 만들려면 휘어지는 디스플레이를 비롯해 각종 전자부품이 들어가는 기판(PCB)도 접힐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휘어지는 배터리도 필요하다. 소재가 바뀌면 이를 부품으로 제조하기 위한 공정기술도 일제히 바꿔야 하기 때문에 갈수록 뿌리산업의 고도화가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자원을 소재로, 소재를 부품으로 가공하는 데 쓰이는 필수 공정기술이 바로 뿌리기술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최근 기존의 뿌리산업 정책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하에 ‘제2차 뿌리산업 기본계획’을 수립·발표했다. 2022년까지 스마트공장 2,000개를 구축하는 등 공정의 스마트화·자동화·친환경화에 방향을 맞췄다. 뿌리산업에 사물인터넷(IoT)과 빅데이터, 인공지능(AI)을 접목해 공정을 혁신하고 청년층에도 매력 있는 ‘일하기 좋은 뿌리기업’을 육성하겠다는 전략이다.

나무는 지상부(tree)와 지하부(root)의 비율이 같고 형태도 닮는다. 잔뿌리가 많으면 지상부의 잔가지도 많아지고 땅속으로 길게 뻗은 뿌리가 있으면 위로도 길게 웃자란 도장지(徒長枝)가 뻗는다. 뿌리에 영양을 줘 나무를 키워야 가지마다 풍성한 결실을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나무도 뿌리산업과 정보통신기술(ICT)이 접목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사용돼 철기시대를 연 뿌리기술이 제조혁신을 주도하는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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