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씨 탓인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흔들어 쓰는 일회용 손난로 하나에 언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녹아내린다. 연말연시라 주고받는 시의적절한 안부 이건만 심신이든 혹은 상황과 처지이든 ‘좀 더 추운’ 사람에게는 더 절절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주에서 귀양살이하던 19세기 조선의 천재 추사 김정희(1786~1856)도 그랬다.
제주로 온 지 어느덧 5년째. 찾는 이는 없고 세상에서 잊힐 것 같은 두려움마저 스칠 정도로 외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인적 드문 추사 유배지로 책꾸러미가 배달됐다. 김정희의 제자이자 중인 출신의 역관으로 중국을 드나드는 우선 이상적(1804~1865)이 보낸 책이었다.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인데다 120권을 갖추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돈과 공을 들였을 법한 귀한 책이었다. 받은 이의 감동을 어찌 말로 다 담겠나.
추사는 붓을 들었다. 작은 온정에도 크게 감사하게 되는 인지상정을 ‘세한도(歲寒圖)’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풀어냈다. 추운 시절을 보내며 새삼 깨닫게 된 제자의 따뜻한 마음에 대한 답례였다.
‘여백의 미’를 논하기에는 그림 속 휑한 공간감이 쓸쓸하기 그지없다. 단출한 집 한 채를 나무 네 그루가 감싸고 있다. 다른 잎사귀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낙엽마저 다 저버린 겨울이다. 집 왼편에 잣나무 두 그루가 섰다. 줄기가 곧다. 가지는 물론이거니와 짧고 뾰족한 이파리까지 모조리 하늘로 치솟아 있다. 황량한 유배지에 있으나 깡깡한 기개를 흐트러뜨린 적 없는 추사의 모습과 닮았다. 성글지도 과하지도 않은 그 침엽수 잎 사이로 파르르 찬바람이 불어나오는 듯하다. 물기 적은 갈필(渴筆)이 낸 효과다. 그 까슬까슬함은 방금 눈을 쓸어낸 것만 같은 마당에서도 느껴진다. 누구는 퇴계 이황이 그려진 천원권 지폐 뒷면 도산서원 한구석에 마당 쓰는 사람이 있다더만 이 그림 어딘가에 마당 쓸고 간 노인네가 있지 않나 뒤적이게 만든다. 추사가 한창일 때 그의 집 문턱이 닳도록 북적이던 사람들의 발자국부터 다녀간 흔적까지 싹싹 지워버리고자 한 듯, 칼칼한 마른 붓질이 싸리비 휘두른 느낌을 풍긴다. 무심하지만 완고하다.
가운데 나직이 자리 잡은 집 한 채가 참으로 기묘하다. 네모 반듯한 벽 한가운데 둥글게 창이 나 있다. 이런 둥근 창을 가진 서재 겸 정자는 ‘매화서옥도’ 등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이나 이토록 소박한 형태는 드물다. 그 위로는 너무도 정직한 이등변삼각형의 지붕이 얹혔는데 장식 하나 없다.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미니멀리즘으로 불릴 법한 세련되고 현대적인 미감이 느껴진다. 옛사람 눈에도 그 특별한 기운은 강렬했을 듯하다.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저서 ‘옛 그림읽기의 즐거움’에서 ‘세한도’를 이야기하며 이 집 그림의 원근법적인 오류를 지적받은 일화를 소개했다. 오른쪽 방향에서 본 집 모양을 그린 것인데 왜 둥근 창문은 왼편에서 본 시선이냐는 질문을 학생으로부터 받았다는 내용이다. 지붕은 뒤로 갈수록 줄어드는데 왜 아랫벽은 뒤로 갈수록 오히려 더 커지느냐, 지붕의 경사도가 왜 앞쪽과 뒤쪽이 서로 다르냐는 등의 지적이었다. 하지만 김정희가 누군가. 일찍이 중국에서 청나라 대가 옹방강(1733~1818)과의 첫 만남에서 “조선에 이런 영재가 있었던가”라며 “경전, 학술, 문장이 조선의 으뜸”이라는 찬문을 받은 이다. 그가 원근법을 몰라서 이리 그리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오주석의 말처럼, 창이 보이는 앞모습은 ‘반듯’하고 뒤로 갈수록 반대로 더 넓어지는 벽은 ‘듬직’하며 잘 보이지 않는 나무 뒤쪽 지붕일지라도 가파르게 ‘기개’를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집은 추사 자신을 상징한다.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그림에서 불세출의 거장만이 보여줄 수 있는 탄탄한 구성력을 드러내는 것은 맨 오른쪽의 둥치 굵은 소나무다. 늙은 소나무의 반쯤 드러난 뿌리가 오른쪽 바닥을 넓게 차지하고 있다. 고집스럽게 우뚝 선 노송이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가지가 어깨를 감싸는 듯 포근하다. 왼쪽 가지가 하늘 끝까지 치솟은 것과 대조를 이룬 수평적인 가지를 통해 신념과 자상함이 공존하는 화가의 내면을 반영한다. 그 소나무 끝 뾰족한 잎사귀가 받치는 지점에 추사가 쓴 ‘세한도’ 세 글자가 반짝인다. 갈필의 마른 붓질 사이로 그림 중간중간에 뭉친 짙은 먹물과 대구를 이루며 빛난다.
추사는 세한도와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장문의 글로 썼다. 연필로 가로 세로 칸을 나누고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해서체로 적었다. 한글을 사용하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궁서체 말투’라 하겠다. 이 글에서는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해 답례로 그려 준 것임을 밝히고 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과 힘을 들이고서도 이를 그대의 이익을 챙겨줄 사람이 아니라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있는 사람에게 보냈구려.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했다.…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나무다.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아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스승의 글과 그림을 받아든 이상적은 분명 감동하여 눈시울을 적셨을 것이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있는 인장은 이상적이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이 새겨져 있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기를 바라는 뜻이다. 이는 중국 한나라 시대 막새기와에 새겨져 있던 글귀다. 스승을 닮아 금석학에 조예 깊은 제자가 감사의 마음을 2,000년 전 기와 글씨를 인용해 적은 것이다. 이상적은 이듬해 다시 북경으로 갈 때 이 작품을 들고갔다. 연초에 청나라 문인 16명과 모인 자리에서 그림을 펼쳐 보이니 곳곳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천재의 필력과 두 사제지간의 정에 감동한 이들이 찬사의 시를 적었고 앞다투어 찍은 인장만 전체 69.2㎝ 화폭에 36개나 된다.
그림을 다시 보자. 서툰 아이의 그림 같다는 이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단순한 선 하나에도 허둥댐이나 미적거림이 전혀 없다.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 김정희에게 그림은 그림이라기보다 서예가 뻗어 나간 또 다른 경지의 표현이었기에 그 형상만으로 평가할 작품이 아니다.
문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김정희의 또 다른 명작으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향군자(國香君子)’를 꼽을 만하다. ‘추사체’와 더불어 김정희를 대표하는 ‘묵란(墨蘭)’, 바로 난 그림이다. 스스로도 “난을 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 그는 “난 치는 법은 예서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풍부한 학식과 높은 정신성을 지닌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학문과 정신에서 좋은 그림이 나온다는 것은 문인화의 정수다. 특히 김정희는 묵란에 있어 모나지만 굳세고, 예스러우면서도 졸박(拙樸)한 미감을 강조했다. 그림 그리는 식으로 꾸미듯이 그릴 바에는 아예 그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을 정도다. 이 나라 제일 가는 향기라며 ‘국향’이라 추켜세운 난 한 포기가 성긴 꽃잎 속에서 길게 두 줄기를 뽑아냈다. 널찍한 화면을 단 두 개의 난 줄기가 큼직하게 갈라 놓았다. 선이 그리 굵지 않음에도 화면 전체를 꽉 채울 만큼 장악력을 가진다. 눌러가며 또박또박 쓴 듯한 아래쪽 예서체 글씨가 그림의 맛과 격을 드높인다. 배운다고 따라할 수 없는 독창성과 과감함이 있으니 왜 천재 소리를 들었는지 알 법하다. 완당, 추사를 비롯해 100여 개 호를 사용했던 것도 그 재능과 관심사가 다양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한해가 저물고 있다. 글을 쓰듯 마음을 그린 ‘세한도’를 연하장 대신 건넨다. 사시사철 푸르게, 혹한에도 잎 떨구지 않는 소나무 잣나무 같은 친구들이 있어 나는 잘 지내노라고. 혹은 홀로 지내는 벗에게 “자네 감싸는 이 나무 같은 존재가 있음을 잊지 마시게” 전하는 인사처럼 말이다. 혹여라도 추운 시절이면 이 그림 한 번 보고 추사의 마음 헤아리며 벗 삼듯 위안 얻으시길, 다행히도 따뜻한 시절을 보내는 중이라면 주변에 춥게 지내는 이가 없나 되돌아보는 시절이면 좋겠다. 늘 한결같은 소나무, 잣나무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