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참화가 한반도를 덮친 지난 1950년대 초반 소년은 전라남도 순천의 한 국민학교 학생이었다. 소년의 같은 반 친구 60명 가운데 태반은 소작농의 자식이었다. 지주의 아들들은 도시락으로 쌀밥과 달걀부침을 싸서 다녔으나 소작농의 아들딸은 점심시간이면 물과 고구마로 끼니를 때웠다.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배 터지게 풍족하지도 않았던 소년의 눈에 이 대비는 너무 가혹한 부조리처럼 여겨졌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소설가가 됐다. 어린 시절의 경험과 인상을 토대로 작품을 써내려 갔다. 지주·소작인의 관계에 바탕을 둔 사회경제적 현실과 분단 조국의 정치적 상황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었다. ‘태백산맥(전 10권)’이라는 제목을 달고 1986년 세상에 처음 나온 이 작품은 800만부 넘게 팔리며 밀리언셀러가 됐다. 이후 ‘아리랑(전 12권)’ ‘한강(전 10권)’을 잇따라 내놓은 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대하소설의 상징으로 한국 문학사에 아로새겼다.
소설가 조정래(74·사진). 쏜살같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느새 우리 문단의 거장이자 시대의 큰 어른으로 자리 잡은 조정래와 최근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찻집에서 마주앉았다. 그는 ‘태백산맥’을 통해 절절한 목소리로 꼬집었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얼마만큼 나아졌다고 보고 있을까. 조정래는 긴 한숨부터 푹 내쉰 뒤 말문을 열었다.
“제가 ‘태백산맥’을 완성했을 때 경제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고(故) 정운영 선생이 말했습니다. ‘태백산맥’은 지주와 소작농으로 얽힌 농토의 문제를 끈질기게 제기함으로써 경제학자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 작품이라고요.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의 경제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지요.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여전합니다.”
조정래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890만명에 육박하는 현실에 기가 막힌다”며 “60년 전에는 소작농이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생존을 위협받았는데 오늘날에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절벽에 매달린 듯 하루하루 위태로운 삶을 지속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지향하지 않는 나라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훨씬 더 소중합니다. 국민의 1%, 10%만 행복한 사회에는 반드시 불행이 닥치게 돼 있습니다.”
경제적 양극화를 향한 조정래의 날 선 비판은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현대사 3부작’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작품을 쏟아내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현역이기도 하다. 마침 지난해 여름 출간한 ‘풀꽃도 꽃이다’는 대한민국의 교육 실태를 짚어보고 올바른 지향점을 모색하기 위해 쓴 작품이었다. 조정래는 “책이 35만부 가량 팔린 직후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판매량이 뚝 떨어졌다. 100만부는 나갔어야 할 책이 40만부에서 그쳤으니 국정농단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나”라며 잠시 농을 쳤지만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사회에서 제일 시급한 문제가 바로 교육입니다. 경쟁, 물론 좋지요. 하지만 옆에 앉아 있는 친구를 적으로 돌리는 경쟁은 결코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성적표에 석차를 명시하며 줄 세우기를 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습니다.”
조정래는 “전교생 350명 중 경쟁에서 살아남은 100명만 야간자율학습을 시켜주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라며 “경쟁에도 사랑과 포용이 필요한데 우리의 입시 경쟁에는 살벌한 적의만 남은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라고 답답해했다. 그러면서 “유럽 선진국처럼 충실한 직업 교육을 통해 85%에 달하는 대학 진학률부터 낮추는 것이 교육 문제 개선의 첫걸음”이라고 진단했다.
때가 연말연시니만큼 문재인 정부를 향한 충고와 새해 덕담을 부탁했더니 조정래는 “현 정부는 ‘도대체 이게 나라냐’라는 1,700만 촛불 시민의 외침으로 태어났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잘라 말했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저질렀던 일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다른 거 없어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에 온전히 활용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대로 된 국가와 정부의 역할입니다.”
대신 그는 현재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놓인 만큼 전략적인 접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조정래는 “북한을 악마나 흡혈귀처럼 생각하면서 평화통일을 추구한다는 건 정말 앞뒤가 안 맞는 얘기”라며 “남북 현안의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이 먼저 대화를 해야 외교적인 입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균형 외교와 등거리 외교입니다.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라는 강대국 틈에서 해법을 찾기 쉽지 않다는 거 잘 압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지요. 주변 열강의 기(氣)를 최대한 살려주되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절묘한 균형을 통해 확고한 입지를 구축해야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조정래가 차기작 집필을 위해 지금 붙들고 있는 화두 역시 ‘국가란 무엇인가’다. 자료조사와 취재를 하느라 본격적인 집필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제목은 ‘천년의 질문’으로 일찌감치 정했다. 작가는 “국가의 존재 이유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거듭했음에도 완전한 답을 얻지 못한 사회학적 질문이자 실존적인 화두”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넘나드는 이야기로 진행될 것”이라며 “총 3권으로 구상하고 있는데 내년 여름부터 연재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차기작뿐 아니라 앞으로 8년 정도의 계획이 제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습니다. ‘천년의 질문’도 3권, 그다음 작품도 3권입니다. 종교와 내세, 영혼과 구원의 문제를 다룰 마지막 작품 역시 3권입니다. 그 작품까지 쓰고 나면 저는 한국 나이로 83세쯤 될 거예요. 이후부터는 장편소설은 그만하고 단편과 에세이만 간간이 쓰면서 살려고 해요.”
전남 고흥군은 지난달 조정래와 그의 가족들이 일군 예술적 성취를 기념하기 위한 ‘조종현·조정래·김초혜 가족문학관’을 개관했다. 조정래의 아버지인 고(故) 조종현 선생은 교육자이자 승려 출신의 시조시인이었다. ‘사랑굿’으로 유명한 시인 김초혜는 평생의 반려자로 조정래와 함께 문학 인생을 걸어왔다. 가족문학관 설립은 국내 최초이며 조정래 개인으로는 ‘태백산맥 문학관(전남 보성)’ ‘아리랑 문학관(전북 김제)’에 이은 세 번째 기념관이다.
조정래는 ‘천년의 질문’을 완간하고 나면 매달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을 순회하며 독자들을 만날 것이라고 약속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국민 세금으로 문학관을 세워주는 것은 작가로서는 최고의 영광이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세금이 헛되지 않도록 정진하되 내후년 ‘천년의 질문’을 끝낸 뒤에는 매월 마지막주 문학관이 있는 보성과 김제·고흥에서 이틀씩 머물며 독자들과 스킨십을 할 겁니다.” /성남=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정글만리 취재노트만 93권…내 모든 작품은 재능 아닌 노력의 산물”
태백산맥도 30권 노트 쓴 후 시작
쉼없이 생각하는 것 외 王道 없어
체력관리 소홀하면 집필 힘들어
週 1회 육식…매일 산책·맨손체조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 외에 다른 왕도(王道)는 없습니다.”
조정래 작가에게 ‘일흔 중반의 나이에도 쉼 없이 작품을 쓰는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정글만리(2013년)’와 ‘풀꽃도 꽃이다(2016년)’로 건재를 과시한 그는 대하 장편소설을 세 작품이나 구상하고 있을 만큼 식지 않은 창작열을 내뿜고 있다. 조정래는 “내 모든 작품은 재능이 아닌 노력의 산물”이라며 “지금도 새로운 어휘를 ‘머릿속 창고’에 저장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국어사전을 들춘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끝없이 갈고닦는 노력이 쌓이고 쌓였을 때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것이 바로 영감이라는 이름의 선물”이라고 덧붙였다.
“분량이 방대한 작품을 주로 써왔기 때문에 발로 뛰는 취재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현장에서 보고 들은 내용과 전문가의 자문 등을 꼼꼼히 정리한 노트를 바탕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합니다. ‘정글만리’의 경우 취재노트만 93권에 달했고 어릴 적 경험과 기억으로 충분했던 ‘태백산맥’도 30권의 노트가 쌓이고 나서야 집필에 돌입할 수 있었어요.”
조정래는 스스로 이룩한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한없는 겸손함을 보이면서도 후배 작가들을 향해서는 따끔한 질타를 쏟아냈다. “후배들의 작품을 읽어 보면 1인칭 시점의 소설이 너무 많아요. 자신이 창조한 인물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자신이 없는 것이지요. 작가와 인물 간에 응당 존재해야 할 적절한 거리감이 사라지다 보니 생동감 넘치는 인물도, 독창적이고 새로운 이야기도 드문 것 같습니다.”
조정래는 좋은 작품을 써낼 자질을 갖췄다면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체력관리라고 강조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62~63㎏의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다”며 “비결은 꾸준한 운동과 소박한 식(食)습관”이라고 전했다. “매일 빠짐없이 30분에서 1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5~6분 걸리는 맨손체조를 하루 세 번 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육식은 일주일에 한 번만 하고 40년 동안 피웠던 담배는 15년 전에 벌써 끊었어요.”
그가 아내인 김초혜 시인과 20년째 살고 있는 경기도 성남 분당 외곽의 자택도 작품활동에 집중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라고 털어놓았다. 조정래는 “50대 중반의 어느 날 가만히 밤하늘을 봤는데 별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며 “가슴이 턱 막히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장 짐을 싸들고 분당으로 내려왔다”고 돌이켰다. 그러면서 “지금이야 사람도 많아졌고 가끔 차도 막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조용하고 한적한 것이 마음에 쏙 들더라”면서 “앞으로도 이곳에 머물면서 체력 안배를 잘해 훌륭한 작품으로 독자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것이 목표”라고 미소 지었다. /성남=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