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동양에만 있는/ 다리다// 이것은 동양에만 있는/ 눈물이다// 이것은 동양에만 있는/ 그리움/ 아롱진 사랑이다// 동양의 지혜로/ 가로 놓인// 은하수/ 먼 별들의 다리// 일 년에 한 번/ 만났다 헤어지는 사랑을 위한/ 하늘의 다리// 이것은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만 놓이는/ 동양의 다리다// 그리움이여/ 너와 나의 다리여.”
한국적 정신성과 동양의 유산을 간직한 채 서양미술을 받아들여 특유의 추상예술을 완성한 이성자(1918~2009)의 1965년작 ‘오작교’를 본 조병화 시인은 같은 제목의 이 시를 헌사했다.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고 하늘도 갈라놓지 못하는 인연이 천륜이다. 아들 셋을 두고 지구 반대쪽 프랑스로 간 어머니의 고통은 살이 에이고 뼈가 갈리는 듯했다. 그 아이들과 자신의 거리를 이으려는 마음이 ‘오작교’를 낳았다.
이성자는 광양댁이라 불리던 어머니의 친정인 전남 광양에서 태어났고 이내 경상도 본가로 옮겨와 성장했다. 행정가였던 부친의 근무지를 따라 김해·하동·창녕 등지를 옮겨다녔지만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진주여고의 전신)를 졸업한 그가 고향으로 꼽는 곳은 경남 진주다. 단식투쟁 끝에 일본유학의 허락을 얻어내 짓센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후 부모가 정해준 인천 남자와 혼인했다. 두 살 터울로 아들 셋을 낳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때를 ‘여자로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꼽지만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로 나와 따로 살면서 가정불화를 겪는다. 전쟁까지 겹쳐 그렇게 자식과 헤어졌다. 아이들을 보지 않고도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해방의 기쁨과 전쟁의 상처가 혼재하던 그 시절만 해도 이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이혼을 택한 이성자에게 한국은 ‘있을 수 없는 곳’이 됐다.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즐거웠던 추억이며, 가슴 아픈 기억들, 모든 것이 태평양 한가운데 파묻혀 사라졌다.…불어 단어 한 자 모르는 채로, 가진 것 없는 무일푼의, 무명의 처지로서 이국땅에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아이 셋 키우던 전업주부의 도불은 도발적이었다. 대학에서 배운 경험을 살려 의상디자인 학교에 입학했다가 순수미술의 재능을 눈여겨 본 교수의 조언으로 그랑드쇼미에르 아카데미에 진학하게 된다. 김환기·유영국·이중섭 등 동시대를 살았던 1세대 현대미술가 대부분이 일본 유학파로 일본을 거쳐 들어온 서양미술을 습득한 것과 달리 이성자는 본고장에서 직접 예술혼을 체득했다. 박영선·남관·권옥연·김흥수·이응노·김환기 등 파리를 거쳐간 한국 화가들과 교류했지만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은 늦깎이 미술학도를 ‘화백’이라 불러주는 이는 적었다. 그래도 묵묵히 그림만 그렸다. 특히 추상미술의 흡수 속도가 빨랐고 서양인에게는 이국적으로 보일 수 있는 한국성의 표현방식이 돋보였다. 회화·판화·도자기·타피스트리 등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했으니 ‘여자 피카소’라 불릴 만했다.
프랑스 생활 십여 년 만에 화가로 명성을 뿌리기 시작했다. 당시 파리에서 다섯 손가락에 뽑히던 대형 화랑인 갤러리 샤르팡티에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고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 초대전이 이어졌다. 한국행 비행기 표를 샀다. 한불문화협정 체결이 이뤄지던 1965년이다. 드디어 간다, 아들들을 만나러. 두 팔로 끌어안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캔버스를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품명 ‘오작교’. 일 년에 단 하루 칠월 칠석에만, 까치와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은하수를 건너 서로 만나는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서린 오작교다. 지구 반대편에 두고 평생을 그리워했고 은하수 별빛만큼이나 숱하게 흘린 눈물방울이 그림 곳곳에 스며들었다. 추상적인 문양으로 이뤄진 그림이지만 잘 보면 서로 껴안으려는 사람의 형상이 떠오른다. “더욱 그림에 매달렸어요. 내가 붓질 한 번 더 하는 것이 아이들 옷 입혀 학교 보내는 것이고, 밥 한술 떠먹이는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죠.” 맘껏 불러보지도 힘껏 안아주지도 못한 아이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서렸다. 붓으로 톡톡 점을 찍듯 화폭을 채워간다. 점 하나하나가 그리움이다. 손끝으로 어루만지는 심정을 담아 붓끝으로 캔버스를 쓰다듬었다. 그즈음 뉴욕에서 활동 중이던 김환기(1913~1974) 화백이 김광섭(1905~1977) 시인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제목 삼아,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점화(點畵)를 완성한 게 1970년의 일이다. 이성자는 상당히 빨랐고 탁월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열린 유화 37점, 판화 40점으로 구성된 국내 첫 개인전은 파란을 일으켰다. 화려하고 당당하게 아들들 앞에 섰다. 여섯 살 아기였던 막내는 170㎝ 장신인 어머니를 내려다 볼 정도로 훌쩍 커 있었다. 어색하진 않을까, 원망하진 않을까, 고민이 얼마나 많았으랴. 천륜지정이라 아들들도 어머니는 그리움 그 자체였다. 큰아들은 신문사 재직시절 프랑스 파리 특파원을 지냈다. 건축을 전공한 둘째는 프랑스에서 공부한 후 현지에서 교수로 후학을 가르쳤다. 막내는 불문학을 전공했고 그것이 유럽을 오가며 무역 사업을 펼치는 기반이 됐다. 세 아들에게 오작교 타고 건너가는 프랑스가 곧 ‘어머니 나라’가 된 셈이다.
15년 만에 한국을 다녀간 이성자의 작품세계는 큰 변화를 보인다. 그간의 그리움을 담아 점을 찍던 것이 해후의 기쁨으로 해갈되면서 이제 오롯이 작품만을 위해 몰입하고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창조하게 이끌었다. 특히 서울에서 파리로 향하는 항로에서 본 북극과 알래스카의 아름다움이 훗날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의 주제가 된다. 그림은 한 개인의 정서를 넘어 인류 보편성을 이야기하며 음양의 조화를 추구한다. 후반기 작품들은 자연의 울림을 넘어 은하수와 오로라가 교차하는 듯한 우주적 풍경을 그린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는 또 다른 일렁거림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프랑스 남부 도시 투레트에서 멍하니 몇 시간씩 올려다 본 밤하늘의 움직임이 화폭에 내려앉았다. 그 기나긴 적막, 고독의 시간에 화가는 지구 반대쪽의 자식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고 자연과 인류를 생각했을 것이고 작품으로 구현한 ‘미래도시’를 상상했을 것이다. 이성자는 1992년 직접 건축디자인을 구상해 프랑스 남부 투레트에 ‘은하수’라는 이름의 작업실을 지었다. 그림에도 오목 볼록한 형태로 등장하는 음양의 이미지처럼 건물 앞부분은 음(蔭)에 해당하는 판화작업실, 이어지는 뒷부분은 양(陽)에 해당하는 회화 전용 작업실이다. 이 건물은 지난해 프랑스 지방정부에 의해 훼손할 수 없는 문화유적지로 지정됐다.
올해는 이성자 화백의 탄생 100주년 되는 해다. 일찍이 그 어떤 한국 미술가들보다 먼저 유럽의 주목을 끌었고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김환기·이응로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가한 거장을, 아직 모르는 이가 더 많다. 마침 국립현대미술관이 오는 3월부터 과천관에서 기념전을 준비하고 있다. 백 년의 시간을 넘어 지구 몇 바퀴를 돌아 만나는 시공초월의 환희를 경험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