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40대 남성 브라이언 마두는 수십년간 자신을 괴롭혀온 유전병 ‘헌터증후군’이 지긋지긋했다. 헌터증후군은 X염색체의 한 유전자가 망가져 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선천적으로 아예 없거나 부족해 몸속에 당이 쌓이는 질병이다. 차츰 뇌를 비롯한 각종 장기 기능이 마비되고 심하면 조기 사망에까지 이르지만 치료제는 아직 없다. 만약 아이가 헌터증후군을 갖고 태어난다면 평생 약을 복용하며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야 한다.
브라이언은 비교적 경증에 속했지만 눈·귀·장·담낭 등이 차례로 손상돼 26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마침내 결심했다. 몸속에 직접 ‘유전자가위’를 집어넣어 불량 유전자를 수리하기로 말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바이오 기업인 상가모세라퓨틱스는 브라이언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의 혈액에 직접 유전자가위를 넣는 세계 최초의 임상시험을 했다. 시험이 성공한다면 브라이언의 몸속 간세포들은 새로 삽입된 유전자의 명령을 받아들여 당 분해 효소들을 평생 만들어낼 것이다.
특정 유전자를 싹둑 자르고 새로운 DNA로 갈아 끼울 수도 있는 유전자가위 기술은 최근 수년 새 생명과학계를 뒤흔든 ‘혁명’으로 꼽힌다. 전 세계 연구진은 유전자가위로 근육량 제한 유전자를 잘라내 일반돼지보다 2배 이상 근육이 많은 ‘슈퍼돼지’를 탄생시키기도 하고 유전자 돌연변이로 청력 상실이 예고된 생쥐의 난청도 예방했다. 유전자가위를 둘러싼 국가·대학·연구진의 경쟁은 나날이 치열해지면서 생태계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 만한 연구도 등장하고 있다. 중국·영국 연구진은 말라리아와 지카바이러스를 옮기는 모기의 유전자를 변형해 불임을 유도, 멸절시키는 연구를 진행 중이고 하버드대 연구팀은 반대로 절멸한 매머드 유전자를 코끼리의 몸에 부활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인류의 삶을 뒤바꿔놓을 글로벌 유전자가위 전쟁에서 한국은 한발 비켜나 있다. 연구를 가로막는 여러 규제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내 생명윤리법은 유전자 치료의 임상연구 범위를 생명을 위협하거나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는 질병으로 한정하고 있다. 앞서 브라이언처럼 경증 헌터증후군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한 유전자가위 치료는 국내에서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 생식세포(배아)에 대한 유전자가위 사용은 임상시험뿐 아니라 기초연구에서도 금지된다. 중국이 백혈병과 방광암·후천성면역결핍증(AIDS) 같은 난치병 치료를 위해 유전자가위를 적용한 인간 배아 연구에 속도를 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국내에서도 기초연구에 한해서는 규제를 대폭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아 합의에 이르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인간 생식세포를 교정할 경우 바뀐 유전형질이 현세대는 물론 미래 세대에까지 대물림될 수 있어 극심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맞춤 아기(디자이너 베이비)’로 대표되는 디스토피아(dystopia)적 공포도 있다. 좋은 유전자만 골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발상은 인간의 가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하자던 히틀러 시대의 ‘우생학’과 손쉽게 연결된다.
학계 대다수는 맞춤 아기의 경우 실현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극단적 사례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유전자가위를 본격 도입하려면 그에 앞서 윤리적 논의가 필요하다는데 동의한다. 특히 유전자가위 기술처럼 활용범위가 넓고 영향력이 크며 적용방식에 따라 찬반이 갈릴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사안별로 엄격하게 선을 그어 명확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전방욱 강릉원주대 생물학과 교수(아시아생명윤리학회장)는 “유전자가위로 줄기세포 등을 교정해 그 치료제를 몸속에 집어넣는 체세포 체외 치료와 사람 몸속에 직접 도구를 넣는 치료법, 인간 생식세포를 교정하는 일 등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지식이나 안전성 측면에서도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데 현재 우리는 세 방식 모두를 ‘유전자가위 치료’로 묶어 허용할지 여부를 논의하려 한다”며 “안전성이 어느 정도 입증된 체세포 체외 치료에 대한 규제 완화는 허용하되 다른 치료는 더 많은 연구가 이뤄진 후 단계적으로 검토하는 방식이 첨단기술을 무작정 규제하지 않으면서도 기술에 따른 위험을 최소화할 방법일 것”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