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토요워치-유전자 가위, 인간의 한계를 자르다]②생태교란 윤리논쟁

●판도라의 상자?

우성 DNA '맞춤형 아기' 가능하지만

오남용땐 종변형 등 생태계에 치명적

과학·종교계 등 윤리가이드 제정 불구

구속력 없어 합의 준수 될지는 미지수

中선 "동의 못해" 이미 배아연구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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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에 파란색 눈동자를 갖고 신체 능력은 뛰어나게 해주세요. 탈모나 근시 유전자는 없애주시고요.”

미래의 한 부부클리닉. 임신을 준비 중인 신혼부부는 의사에게 갖고 싶은 아기의 이상형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를 가진 부부는 대대로 탈모였던 남편 집안을 고려해 탈모 유전자를 제외해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부부는 고가의 의료비를 지불한 만큼 10개월 뒤 부부의 취향이 반영된 맞춤형 아기를 품에 안게 된다.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새롭게 새겨넣음으로써 인간이 타고난 형질까지 바꿀 수 있게 하는 유전자가위 기술. 상상에서나 가능했던 일들을 점차 현실화하는 이 기술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엇갈린다. 누군가는 인류를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하는 ‘장밋빛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꿈꾸는 반면 다른 편에서는 새로운 빈부격차가 탄생하는 것은 물론 생태계 혼란을 초래하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이라고 비난한다. 상반되는 분위기 속에서 유전자가위 기술을 과연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 것이냐에 대한 법·규제 완화 논쟁도 가속화하는 상황이다.

특히 국내에서는 지난해 8월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이 인간 생식세포를 유전자가위로 교정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에 불을 붙였다. 김 단장은 국내 규제에 가로막혀 할 수 없었던 인간 배아세포에 관한 연구를 미국 오리건보건과학대 교수팀과 함께 해외에서 진행하며 배아세포 속의 비후성 심근증 변이 유전자를 유전자가위로 제거해 발병 위험을 없앨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줬다. 비후성 심근증은 선천적으로 좌심실 벽이 두꺼워져 젊은 나이에 돌연사를 일으키는 질환으로 부계 유전자를 통해 자녀에게 유전될 확률이 50%나 된다. 연구로 만들어진 배아를 어머니의 몸에 착상시키기만 하면 비후성 심근증 걱정이 없는 아이가 탄생하게 되는 셈이다.

유전병 우려가 있는 부모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연구결과는 인간 생식세포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해질 수 있도록 국내 생명윤리법을 손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국내에서는 인간 배아에 유전자가위 시술을 하는 연구가 원천 금지되지만 미국·영국·일본 등에서는 희귀 난치병 치료를 위해서는 배아에 관한 기초 연구를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지며 규제 완화 주장에 힘이 실렸다. 글로벌 연구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인간 배아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최윤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치료의 범위에서 유전자가위 기술이 갖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적어도 이 범위에서만큼은 배아세포에 대한 연구도 할 수 있게 길을 열어 줘야 한다”며 “다만 기술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도록 모니터링하는 시스템도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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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아 규제 완화까지는 가시밭길이 전망된다. 종교계와 시민단체, 일부 학계는 특히 인간 생식세포 연구 등은 위험성과 파급력이 지나치게 크므로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특히 시민단체의 경우 유전자가위가 우성 유전자만 골라 탄생시켜 ‘디자이너 베이비’ ‘GMO 베이비’를 만들고 이게 빈부격차로 이어질 것으로 우려한다. 1997년 개봉한 영화 ‘가타카’는 유전자 조작으로 새로운 계급 문화가 발생한 사회를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 유전자 조작 없이 자연스럽게 출생한 사람은 열성 유전자를 가진 ‘부적격자’로 분류돼 단순 노동직을 맡고 우성 인자를 가진 사람인 ‘적격자’만이 대우 받는 일을 한다. 이런 공포에 대해 유전자가위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제니퍼 다우드나 UC버클리 교수 역시 “히틀러가 와서 유전자가위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고 싶다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며 “기술이 잘못된 사람의 손에 들어가 파괴적으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고 말하곤 한다.

무분별한 유전자가위 사용이 생태계의 균형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물이나 식물에 사용하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앞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유전자가위로 말라리아를 퍼뜨리는 모기를 퇴치하는 방안을 언급한 바 있다. 말라리아에 저항하는 유전자를 후세대에 퍼뜨리도록 하거나 말라리아를 옮기는 모기는 임신이 불가능하도록 교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특정 유전형질이 세대를 거쳐 우선 유전되도록 하는 ‘유전자 드라이브’는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다행히도 유전자가위의 오·남용을 막자는 목소리는 과학계 자체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국제적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가시화되는 중이다. 지난해 11월 전 세계 과학자, 환자 옹호단체, 종교단체 등 200명은 ‘인간 세포 생명공학 활용에 대한 10대 윤리 원칙’을 협의해 학술지인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 게재했다. 합의된 원칙에는 연구자들이 질병 고통과 환경 피해 감소를 목표로 연구하고 기술이 가진 잠재적 위험성을 인식해 해결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과학기술정책위원회에서도 오는 2월 유전자가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 작업에 참여한 이명선 한국보건산업진흥원 팀장은 “유전자가위를 동물에 적용할 경우 종 변형으로 인한 생태계 교란 가능성이 위험으로 지적됐다”면서 “과학자들이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만으로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강조했다.

다만 구속력이 없는 합의가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일례로 중국은 이 원칙에 동의하지 않아 유전자가위 배아 연구에 관한 연구논문만 벌써 여러 건 발표한 바 있다. 중국은 유전자가위에 대한 특별한 규제가 없어 이미 백혈병·방광암·에이즈 등 치료제 개발에 기술을 적용하는 여러 건의 연구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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