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방송되는 KBS1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겨울, 야(夜)한 음식이 좋다 - 야식’ 편이 전파를 탄다.
어둠이 길고 깊은 겨울의 밤. 밤참이 간절해지는 시간. 화롯불에 구워 먹던 고구마의 추억부터 국민 야식 족발까지. 우리의 곁에서 빛났던 밤의 음식을 만난다.
▲ 야식, 밤을 낮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단함을 달래는 한 끼 - 대구 콩국
야식은 이름 그대로 밤에 깨어있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한 끼다. 낮보다 아름다운 도시의 밤, 대구에는 대구 사람만 안다는 별미 야식이 하나 있다. 새벽까지 도로를 누비는 택시 기사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는 그것, 바로 콩국이다. 콩을 갈아서 만든 따뜻한 콩물에 찹쌀과 밀가루 반죽을 튀겨 말아 먹는 콩국은 50여 년 전 대구에 정착한 화교들이 만들어 팔던 중국 음식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된 음식으로 겨울밤, 일에 지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달래주던 고마운 한 끼가 되어주었다.
▲ 길쌈으로 밤을 지새우던 경주 손명주 마을의 겨울밤 노동식
새로운 비단이라는 뜻의 신라는 오래전부터 비단 생산의 요충지였다. 신라 천년의 빛을 간직한 경주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손으로 짠 명주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마을이 있다. 여름 내내 누에를 치고, 농사를 끝내면 마당에 모여 고치를 삶고 말려 실을 풀어낸 다음 밤새 명주 베를 짜느라 바쁘다. 고치 속에 있는 번데기는 아이들이 옆에서 기다리면서까지 먹던 별미 중의 별미! 명주실을 염색하기 위해 사용하던 소나무 껍질로 떡을 만들고, 실을 말리던 화로에 구워 먹던 고구마에 시원한 동치미 한 그릇에, 여럿이 모여 일을 할 때면 빠지지 않았던 생선인 미역추와 새알심을 넣은 미역국 한 솥 끓여내면 긴 겨울밤, 고운 베를 짜느라 시린 손으로 고된 밤을 지새우던 할머니들의 허기진 몸과 마음이 든든해졌다.
▲ 안동 양반가에 전해오는 한밤의 성찬 - 몸도 마음도 거뜬해지다
야식은 밤에 먹는 음식이다 보니 조리법이 단순한 한 그릇 음식으로 위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소화가 잘 되는 식재료가 사용되곤 한다. 경북 안동, 전통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이곳에는 늦은 밤 손님상에 올리던 전통 밤참이 전해온다. 쌀누룩과 구멍떡을 이용해 죽처럼 담가 숟가락으로 떠먹는 술, 이화주와 세 가지 색으로 물들여 만든 녹두묵, 땅속 구덩이에 묻어두었던 무와 배추 뿌리로 만든 무전과 배추뿌리찜은 담백한 맛에 소화가 잘되어 밤에 먹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데다 뿌리채소의 영양까지 더한다. 귀한 손님상에 올리던 닭고기 음식인 포계는 닭을 토막 내 기름에 구워낸 것으로 오늘날 치킨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소박하지만 귀하게 차려낸 한밤의 성찬, 밤이 허락한 최고의 호사를 만나본다.
▲ 서민들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준 국민 야식 - 장충동 족발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며 밤낮없이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야식은 가장 따뜻한 위로였다. 찹쌀떡 메밀묵 장수의 추억과 길거리 군밤 군고구마를 거쳐 60년대 등장한 라면은 가난한 서민들의 밤을 함께한 국민 야식의 시대를 열어주었다. 그중 국민 야식 1순위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족발! 족발하면 떠오르는 곳이 장충동이다.
왜 하필 장충동에서 족발이 유명해진 걸까? 장충동 족발의 산증인인 전숙렬 할머니의 기억은 60여 년 전 전쟁 후 피난 내려온 실향민 시절로 거슬러 오른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다는 된장족발이 오늘날 장충동 족발의 시작! 족발이 유명하게 된 데는 장충동체육관이 한몫했다. 레슬링 경기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6-70년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장충동 일대가 마비될 만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족발집들도 문전성시를 누렸던 것. 수십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체육관도, 족발 거리도 변해버렸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은 벌집 건물에 남아있는 할머니의 오래된 토굴처럼, 장사하다 남은 돼지족으로 만들어 먹던 매운돼지족볶음은 이제 가족들의 추억으로 남았다. 60년째 변함없이 끓고 있는 족발 국물처럼 서민들의 고된 하루를 위로해주던 장충동 족발의 추억으로 들어가 보자.
▲ 겨울밤의 추억, 야식이 있어 지루한 줄 모른다 - 사천 대곡마을 이야기
밤이 가장 긴 하루, 동지를 설 만큼이나 크게 지낸다는 사천 대곡마을 사람들. 이 마을에서는 팥죽에 넣는 새알심을 불에 구워 아들인지 딸인지를 가늠하는 재밌는 풍습이 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밤, 팥죽을 쑤고 남은 불씨를 화로에 담아 구운 가래떡에 홍시를 찍어 먹으면 호된 시집살이도 달곰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삼천포가 가까워 겨울이면 흔하게 나던 쥐포는 최고의 겨울 간식! 숯불에 쥐포 굽는 냄새가 진동하면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구운 쥐포에 술 한잔 나누면 잔칫날이 따로 없었다. 팥죽 한 그릇으로 마을의 안녕과 가족들의 복을 빌고, 떡 하나 쥐포 하나 구워놓고 화롯가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정을 나누던 시절. 야식이 있어 긴 겨울밤도 지루한 줄 모른다.
[사진=KBS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