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EY(Ernst & Young)는 지난해 미국·중국 등 전 세계 20개 국가를 대상으로 국가별 ‘핀테크(금융과 정보기술을 접목한 신산업)’ 이용률을 조사했다. 이는 전체 응답자 중 지난 6개월간 2개 이상의 핀테크 서비스를 이용한 사람의 비율을 나타낸 지표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한국의 지난 2017년 핀테크 이용률은 32%로 미국(33%)은 물론 멕시코(36%), 남아프리카공화국(35%)보다도 낮았다. 중국(69%)과 인도(52%)의 이용률은 한국보다 2배 가까이 높았다. 은행은 물론 정부까지도 나서 핀테크를 통한 금융혁신이 미래 먹거리라고 외치고 있지만 실제 국내 금융업의 ‘디지털 민낯’은 세계 중하위권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국내 금융회사들은 비상이다. 몇 년 전부터 핀테크 도입을 위한 변신을 서둘러왔지만 체감 속도가 해외에 훨씬 못 미쳐서다. 금융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16일 “금융회사들 모두 절박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지만 정부 규제 등으로 인해 혁신에 속도가 붙지 않는 상황”이라며 “여기서 뒤처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산업 쇄신을 준비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한국 핀테크 이용률 32%로 中 69% 절반도 못미쳐
“절박하지만 정부 규제 영향에 디지털혁신 지지부진”
글로벌 고객 DB업체 인수 등으로 IT금융 서둘러야
당장 전통적인 금융의 수익모델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다. 인터넷전문은행의 등장과 정부의 서민금융 정책으로 예대마진과 수수료 수익에 의존해왔던 시대가 저물고 있는 탓이다. 저축은행들은 이미 인터넷은행들과 힘겨운 고객 유치 경쟁을 벌이는 등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몰렸다.
금융당국의 가산금리 제한 등으로 시중은행도 큰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인터넷은행 등장으로 비대면 확산 등 판매채널도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예전처럼 오프라인 매장에 고객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은행이나 보험·증권사들이 더 이상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은 공통의 생각이다. 그런데도 국내 은행은 여전히 인력 구조나 점포 운영 형태, 직원들의 마인드 등이 과거 관행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반면 해외 은행들은 이미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벨기에 KBC뱅크는 지난해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마이카’ 서비스를 출시했다. 이 서비스를 통해 고객들은 자동차 판매 딜러를 찾는 것은 물론 대출, 보험, 번호판 등록, 심지어 견인차 서비스까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시스템 자체가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설계됐기 때문에 사기 판매업자를 만날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깝다. 장효선 삼성증권 연구원은 “과거 금융업은 어느 산업보다 변화 폭이 미미해 변화에 둔감했다”며 “하지만 최근 금융업 트렌드가 급변하면서 시장 변화를 선도하는 기업만이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국내 금융사들도 디지털 혁신에 너도나도 나서고는 있다. 국내 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들이 신년사를 통해 “디지털 강화”를 한목소리로 외친 것만 봐도 열의는 굉장히 높다. 실제 윤종규 KB금융 회장은 경쟁자로 구글과 아마존과 같은 정보기술(IT) 업체를 지목했고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은 ‘디지털 신한’을 경영전략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조 회장은 계열사인 제주은행을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글로벌 디지털 은행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은 핀테크 역량을 발전시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혀왔고 지난달 취임한 손태승 우리은행장은 취임사에서 “기존 애플리케이션인 ‘위비 플랫폼’을 뛰어넘는 강력한 디지털 플랫폼을 내놓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디지털 혁신을 위해서는 CEO의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조직 전체가 IT화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IT 업체가 은행업을 하는 것은 쉬워도 전통 금융업을 고수해온 은행들이 IT화하는 데는 수십 배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은행업은 필요하지만 은행은 아니다(Banking is necessary, but banks are not)’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조직 전체가 디지털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금융지주 CEO들은 조직의 디지털 전환에 따른 목표와 이행 과정을 철저히 체크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씨티은행이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기존의 오프라인 점포 인력을 자산관리 상담 인력으로 재교육해 조직 전반의 리빌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조직의 디지털 전환을 빠르게 하기 위해 인수합병(M&A)에도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조직에 꼭 필요하지만 없는 핀테크 업체나 글로벌 고객 데이터베이스(DB) 업체 등을 인수해 디지털화를 가속화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삼성전자가 전장 전문 글로벌 업체인 하만을 인수했듯이 금융사들도 파격적인 M&A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금융업 진출을 노리는 글로벌 IT 업체와 협력을 강화하는 등 과감한 도전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권이 디지털 혁신을 강조하지만 아직 앱을 잘 만들려는 수준일 뿐 본격적으로 수익모델을 발굴해내지 못하고 있다”며 “글로벌 대형 은행들이 비대면 서비스를 강화하면서 지점을 줄이고 인력을 절감하는 등 근본적인 체질개선에 나선 것과는 대조적”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디지털 전환에 있어 목표와 시장 자체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하고 그런 전략을 구사하는 CEO가 필요한 때”라고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금융당국이 금융을 육성해야 할 산업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정부 정책을 보조하는 툴(도구)로만 생각하면서 규제만 하려다 보니 금융권의 자율성을 살리지 못하게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