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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연극 '리차드 3세'] 섬세한 황정민...한 편의 詩 보다

황정민, 10년만의 연극 복귀작

곱추왕 다면적 인격 연기 돋보여

많은 대사도 정확한 발성으로 소화

정웅인·김여진 등 맛깔난 연기

몰입감 높인 무대도 관객 압도



“나는 왕관을 꿈꾼다. 깎아지는 절벽 위에 서 바다를 향해 원망을 쏟아 붓는 소년처럼. 가시덤불 속에서 길을 잃고 필사적으로 길을 찾다 쓰러진 소년처럼. 나 왕관을 꿈꾼다. 나 그것을 가지리. 그리하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영광의 옷을 입으리.”

화살촉과 검, 온갖 날카로운 것들이 리차드 3세를 향한다. 세 치 혀와 간악한 재주로 혈육을 죽이고 끝내 왕좌에 오른 리차드 3세. 그의 적 리치먼드 백작의 칼끝이 살을 파고들자 그는 땅 밑으로 꺼지기 시작한다. “내가 지은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고자 한다”고 읊조렸던 그는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듯 자취를 감췄다. 그의 손에 죽은 이들, 그의 욕망을 잠재운 이들이 꺼진 땅을 경계로 서 리차드 3세를 내려다 본다.






10년만에 무대에 선 황정민의 연극 복귀작 ‘리차드 3세’는 셰익스피어의 시적 언어와 배우들의 명연기, 세련된 무대가 만나 완성된 ‘한 편의 시’였다.

실존 인물인 리차드 3세는 15세기 영국 요크 왕가의 마지막 왕으로 셰익스피어는 장미전쟁의 최후 승자가 된 튜더왕조의 정당성을 위해 리차드 3세를 왕위를 거머쥐기 위해 친족 살인도 서슴지 않는 추악하고 잔인한 희대의 폭군으로 조각해냈다. 원작을 충실하게 따른 이번 작품은 꼽추에 온몸이 비틀어진 신체적 결함에도 권모술수와 화려한 언변, 리더십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리차드 3세가 끝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차분히 그리면서도 동질감과 연민을 거두지 않았다.



이를 몸소 구현해낸 것은 물론 황정민이라는 걸출한 배우의 힘이다. 몸을 굽히고 손목을 뒤튼 자세를 유지하는 힘든 연기에도 황정민은 굽은 등의 미세한 각도를 조절하고 말투와 표정을 바꿔가며 욕망과 콤플렉스, 양심의 충돌 속에 내면적 갈등을 겪는 리차드 3세의 다면적인 인격을 섬세하게 드러냈다. “오, 나약한 양심이여, 네가 어떻게 이렇게 감히 나를 괴롭힐 수가 있느냐. 차가운 공포의 땀방울이 떨고 있는 내 살 위에 맺혀 있구나”라며 그가 죽인 망자들이 등장하는 악몽에 몸을 떨다가도 “나는 진군해야만 한다. 나는 진군한다. 악인은 결코 잠들지 않는다”고 스스로 주문을 외는 모습에서 권력을 탐하는 것 외에는 기댈 곳 하나 없던 나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한다. “연극을 처음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좋은 교본이 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을 증명하듯 방대한 대사량에도 정확한 발성에 발음 한 번 꼬이는 법이 없었다.



모든 배우들이 ‘원캐스트’로 완성도 높은 연기를 펼치는데 특히 정웅인, 김여진, 정은혜 등의 기량 좋은 배우들이 말맛을 살리고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톡톡히 역할을 했다. 뮤지컬 무대를 벗어나 처음으로 연극 연기에 도전한 박지연 역시 흠잡을 데 없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또 한 가지는 무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꾸며진 무대는 대관식 장면, 리차드 3세가 리치먼드 백작의 칼끝에 죽음을 맞는 장면 등에서 순식간에 모양을 바꾸며 또 하나의 시적 언어를 완성한다. 특히 장막이 걷히고 드러나는 28m 깊이의 무대의 미장센은 연극 무대 활용의 새로운 전범이 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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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명의 인물이 등장해 갈등구조가 얽히고설키는 원작 리차드 3세는 연극으로 감상하기 쉬운 작품이 아니다. 이를 감안해 한아름 작가와 서재형 연출은 동시대를 다룬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섭렵하며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축하는 한편 불필요한 인물이나 스토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다듬어 관람 문턱을 낮췄다. 올 한 해 독일과 프랑스의 유명 연출가들이 선보이는 연극 ‘리차드 3세’의 무대가 두 번 더 예정돼 있는 가운데 이번 작품은 충실한 인물 해석과 세련된 연출 기법의 힘을 보여주며 첫 포문을 성공적으로 열었다. 내달 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 사진제공=샘컴퍼니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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