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격 없는 소통' 하자더니…되풀이 되는 '경제단체 잔혹사'

'정치 외풍 막아달라' 호소에도

차기 회장 선임 개입 등 일삼아

정부코드에 반대하는 의견땐

기업수사로 칼 겨눠 목소리 차단

외국계 회원사 중심 불만 고조

2615A16 정치권의 경제단체 주요 압박·이용 사건




“정치권은 각종 제도개선 추진과 경제회복의 현실 상황에 대한 냉철한 판단으로 국가 백년대계의 안목으로 임해달라.”


지난 2002년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등 경제 5단체가 발표한 ‘금년 국가대사 즈음한 경제계 제언’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주력 산업은 쇠퇴와 구조조정에 돌입하고 규제에 막혀 미래를 이끌 신산업이 안 보이는 2018년 경제단체 신년사에 그대로 담아도 손색없을 정도다. 당시 경제단체들은 정치권 ‘외풍’을 막기 위해 제언을 내놓았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정치권의 압박에 굴복해 한나라당에 불법 대선 자금을 모금해 전달한 ‘차떼기’ 사건에 휘말렸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지난 16년 동안 경제단체를 누르려는 정치권과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순수 민간단체인 경총 회장 선임 절차가 최근 정권 실세들의 개입으로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재계의 입장을 강하게 대변한 김영배 상임부회장을 교체하고 정권과 코드를 맞는 인사를 앉히기 위해 잡음이 커지는 상황이다. 경제계에서는 “노사문제에서 경총마저 친정부 입맛에 맞추려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전 정부에서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려 조직이 축소된 전경련에 이어 한국무역협회장도 참여정부 인사로 채워지면서 재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대한상공회의소를 소통 창구로 쓰고 있지만 정부의 눈치만 보고 있다는 비판이 비등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재계는 현 정부가 국정농단 사태로 전경련, 비정규직 문제로 경총을 ‘적폐단체’로 낙인찍으면서 정권마다 홍역을 겪는 ‘경제단체 잔혹사’가 이번에도 재연될 조짐에 숨죽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겉옷을 벗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재계 총수들과 ‘호프 미팅’을 하며 격의 없는 소통을 강조했지만 결국에는 전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재계를 소통의 대상이 아닌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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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정부에 반기를 드는 경제단체에 대한 압력은 곧 기업 수사로 연결돼왔다. 김영삼 정부 당시 고(故) 최종현 전경련 회장(SK그룹 회장)은 정부의 시대착오적 규제를 풀어달라며 목소리를 높이자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받았고, 김대중 정부 때 전경련 회장을 맡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그룹 해체를 목도해야 했다. 당시 기세등등한 민주노총 등은 효성의 울산공장 파업 때 공권력 투입에 대응해 전경련과 경총 건물에 화염병과 계란을 투척하기도 했다.

경제단체들은 “정치외풍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정치권은 오히려 2002년 차떼기 사건으로 재계를 대선자금 모금창구로 활용했다. 노무현 정부와는 인수위 시절부터 급격한 경제정책을 두고 잡음을 일으켰다가 결국 사과하며 꼬리를 내렸다. 이명박 정부는 전경련을 보수단체 지원 창구로 활용했고 박근혜 정부 때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며 사실상 재계를 대변하는 역할을 잃었다. 전경련 관계자는 “당시 청와대의 요청을 거부했으면 그때 (검찰 수사 등) 맞았고 지원을 해도 언젠가는 맞을 줄 알았다”며 “조직 내에서는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 정부 출범 전 김영배 경총 전 부회장의 말대로 “주면 줬다고 패고, 안주면 안 준다고 팬다”는 것이 수십 년간 변하지 않는 정부와 경제단체 간의 관계라는 설명이다.

현 정부의 경제단체 길들이기도 심상치 않다. 올해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문재인 대통령 대신 이낙연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한 것만 봐도 경제단체를 보는 정부의 스탠스를 짐작할 수 있다.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대통령이 불참한 적은 1984년 아웅산테러와 노무현·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 등 3번뿐이다. 참여정부 인사가 앉은 무역협회에 이어 회장 선임 절차가 파행을 겪고 있는 경총마저 정부 코드와 맞는 인사가 자리할 경우 경제단체가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미 외국계 회원사들을 중심으로 불만도 터져나오고 있다. 올 1월 전경련은 이 총리를 초청해 평창동계올림픽 후원을 기념하는 신년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는 평창동계올림픽을 후원하는 외국계 회원사가 “돈만 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불만 때문에 열린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현 정부는 기업 후원만 받고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경제단체 목소리는 틀어막자는 심산 아니냐”며 “임기 말로 갈수록 경제현장과 정책 간 불협화음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경우·한재영기자 bluesquare@sedaily.com

구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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