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바지 3종=6만 9,000원’
15년 전만 해도 홈쇼핑업계에서 통용되던 공식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TV홈쇼핑에서 파는 패션 제품은 ‘브랜드는 없지만 싸게 많이 묶어 파는 상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좋은 제품은 백화점에서, 속옷이나 집에서 입는 일상복은 떨이 가격에 홈쇼핑에서 싸게 산다는 게 일반적인 소비자들의 인식이었다. 일부 제품은 싼 가격에 비해서도 품질이 너무 떨어져 소비자들의 비난이 쇄도하기도 했다. 조악한 품질의 옷을 싼 가격에 팔다 보니 당연히 매출도 많이 나오지 않던 시절이다.
홈쇼핑업계는 2000년대 중반 이에 대한 탈출구로 브랜드 업그레이드를 선택했다. 조금이라도 유명 브랜드 제품을 팔면 품질 문제도 줄어들고 매출도 늘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고객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백화점·전문점 등에서 이미 파는 제품을 비슷한 가격에 묶어 파는 것밖에 안 된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홈쇼핑 업계가 이 같은 위기를 자체 패션 브랜드(PB) 고급화로 돌파하고 있다. TV홈쇼핑에서 애물단지였던 패션 품목이 이제 매출 20~30%에 육박하는 최고 효자 종목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홈쇼핑업계는 이에 머물지 않고 올해부터 소재 강화를 통한 프리미엄화 전략에 앞다퉈 매진하는 분위기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패션 트렌드세터로 진화 = 한때 업계의 ‘미운 오리 새끼’ 대접을 받던 홈쇼핑 패션 부문은 이제 전체 패션 업계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리딩 파트로 자리잡고 있다.
홈쇼핑 패션이 대전환을 이룬 시점은 2010년 이후다. 이때부터 다른 오프라인 점포에서도 다 파는 브랜드 제품을 힘들여 팔기보다는 유명 스타일리스트를 영입하고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해 홈쇼핑만의 패션을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다.
선두주자는 CJ오쇼핑(035760)이었다. CJ오쇼핑은 정윤기·한혜연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자체 패션 브랜드를 공동 기획하고 고태용·계한희·박승건 등 디자이너와 협업해 최신 트렌드의 패션 상품들을 다수 출시했다. 이 시기 다른 업체들도 앞다퉈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며 엎치락 뒤치락하기 시작했다. 현재 CJ오쇼핑의 대표 패션 브랜드가 된 ‘셀렙샵’은 이 시기 탄생해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 몇 안 되는 브랜드다.
2015년부터는 경쟁력 있는 해외 브랜드를 단독으로 들여오는 ‘라이선스 브랜드’ 시대가 본격 개막했다. CJ오쇼핑이 웨딩드레스로 유명한 베라왕의 뉴욕 본사와 계약을 맺고 국내에서 단독으로 들여온 ‘VW베라왕’이 그 대표 사례다. 이후에도 해외 유명 아티스트의 이름을 딴 ‘장 미쉘 바스키아’, ‘키스 해링’ 등의 브랜드를 비롯해 프랑스 남성 패션 브랜드 ‘다니엘 크레뮤’ 등이 홈쇼핑 회사를 통해 국내에 단독으로 상륙했다.
◇ 홈쇼핑 의류 매출 신장률 두 자릿수 성장 = 홈쇼핑 패션 사업이 호황을 이루면서 홈쇼핑 패션은 단순히 패션업계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시장을 주도하는 지위까지 올랐다. 실제로 CJ오쇼핑의 경우 지난해 패션 의류 매출 신장률이 전년대비 15%에 달했다. 올해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체 매출에서 패션의류가 차지하는 비중도 20%를 넘었다.
여기에 가방, 신발 등 패션잡화까지 더하면 그 비중이 30% 이상이라는 후문이다. 지난 22일 처음 출시된 현대홈쇼핑(057050)의 패션 PB ‘밀라노 스토리’의 경우 첫 방송 1시간 만에 20억 5,000만 원의 매출을 달성, 이 회사 패션 부문 시간당 매출 신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업황 정체로 오프라인 기반의 패션 브랜드 대부분이 제자리 걸음을 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실적이다.
최근 굵직한 패션 관련 이슈를 이끈 것도 홈쇼핑 브랜드다. 특히 지난해 봄 출시된 CJ오쇼핑 VW베라왕의 아이보리색 슈트는 김정숙 여사가 외국 순방 시 입어 큰 화제가 됐다. 이 제품은 지난해 가을 다시 인기몰이에 나서며 CJ몰에서 평소보다 10배 넘게 판매되고, 상품 매진 후에도 구매 문의가 쇄도하는 신드롬을 연출했다.
◇소재 강화 등 제품 고급화 업그레이드=패션 부문이 홈쇼핑업계에 중핵 사업으로 떠오르다 보니 최근 들어 각 업체들은 PB나 단독 브랜드 확보에 한층 더 열을 올리는 분위기다. 각 홈쇼핑 기업들은 봄·여름 시즌을 겨냥해 새 브랜드와 신상품을 잇따라 출시하며 치열한 경쟁을 예고했다.
CJ오쇼핑이 ‘VW베라왕’, ‘셀렙샵 에디션’, ‘씨이앤 태용’의 봄 신상품을 대거 출시한 것을 비롯해 현대홈쇼핑도 밀라노스토리를 론칭했다. 롯데홈쇼핑도 이달 20일과 21일 PB인 ‘LBL SPORT’와 ‘아이젤’을 연이어 선보였다.
아울러 각 업체들은 단순 브랜드 고급화를 넘어 소재 강화를 통한 제품 고급화에 본격 나서는 모습이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100% 캐시미어 등 고급 소재를 적용한 제품을 잇따라 출시하면서 프리미엄 이미지를 한층 높이고 있다.
CJ오쇼핑의 경우 지난해 이탈리아 최고의 원단 제조사와 협약을 맺고 자사 패션 브랜드에 현지 고급 소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같은 해 9월 세계 최대 캐시미어 전문 기업인 ‘고비’사와 양해각서(MOU)를 맺고 프리미엄 몽골 캐시미어 100% 상품을 대거 선보였다.
특히 고비와 손잡고 출시한 브랜드 ‘고비’는 지난해 3개월 동안만 총 124억 원의 주문 실적을 기록했다. 이달 22일 봄 신상품 첫 방송에서도 1시간 동안 총 7,000개 이상의 준비 물량을 완판하는 등 흥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고비 브랜드는 2회 이상 구매한 고객이 전체의 84%일 만큼 만족도도 높다는 후문이다. 올해는 총 200억 원의 주문금액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GS홈쇼핑(028150) 역시 손정완 디자이너의 ‘SJ와니’와 ‘마리아 꾸르끼’, ‘비비안탐’, ‘모르간’, 가죽 브랜드 ‘로보’ 등의 브랜드를 앞세워 패션 프리미엄 전략을 강화하기로 했다.
홈쇼핑 업계 관계자는 “슈퍼주니어 등 최근에는 유명인들까지 판매 방송에 출연할 정도로 홈쇼핑 패션 상품이 빠르게 고급화되고 있다”며 “예전처럼 여러 개를 한꺼번에 파는 게 아니라 한 벌을 사더라도 제대로 된 옷을 사길 원하는 고객 수요를 감안해 업계 모두 소재 강화에 힘쓰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