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배우 김상경을 만나면 나타나는 반응이다. 그렇게 유쾌하길 좋아하는 김상경은 자신의 필모그래피 역시 긍정적으로 쌓아가는 중이다. 올해만 무려 세 편째, ‘1급 기밀’도 ‘궁합’도 이번 ‘사라진 밤’도 모두 다른 김상경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영화는 없다”고 깨우친 그는 모든 영화에 힘을 쏟는다. 20년차 정도면 단계별 에너지 조절을 할 법도 한데 여전히 사전작업부터 연기, 홍보까지 한 영화의 탄생 전 과정에서 허투루 일하지 않는다. 이번 ‘사라진 밤’ 또한 흔히 말하는 ‘대기업 영화’가 아님에도 최선의 열과 성을 다한다. 그게 김상경이 작품을 대하는 ‘자세’이자 ‘도리’인가 보다.
‘사라진 밤’은 국과수 사체보관실에서 시체가 사라진 후 시체를 쫓는 형사,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남편, 사라진 아내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 하룻밤의 강렬한 추적 스릴러. 2014년 개봉한 오리올 파울로 감독의 ‘더 바디’를 원작으로 했다.
‘또 형사야?’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김상경은 지난 ‘살인의 추억’ ‘몽타주’ ‘살인의뢰’ 속 형사와 다르다. 끝까지 사건을 의심하는 가운데 한껏 허술하고 유머러스해졌다. 느슨하고 빈틈 많고 뺀질하기까지 한데, 이 모든 게 치밀한 계산이란다. 기자와의 만남에서 연신 호쾌하게 웃다가도 작품과 영화계의 현실을 짚을 땐 핵심을 파고드는 냉철함을 보였다. 그런 김상경이 형사 우중식과 닮아있다.
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상경은 “국과수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연기를 보여주는데, 모든 게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굉장히 힘든 싸움이다. 중식은 헐렁해 보이는 캐릭터로서 사람을 방심하게 만든다.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극이 전반적으로 어두워서 나까지 진지해지면 너무 무거워져 따라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나리오부터 너무 재미있었다. 캐릭터가 웃겨서 저절로 따라가게 되더라. 보통 같았으면 초반에 바로 결말을 눈치 챘을 텐데, 이번엔 2/3 정도를 보고서 결말에 깜짝 놀랐다. 복선을 영특하게 놨다”고 이전과 다른 형사 캐릭터를 소개하며 ‘사라진 밤’만의 매력을 강조했다.
“오랜만에 스릴러 장르에서 영화적인 만족도를 주는 영화가 나온 것 같았다. 영화다운 느낌의 영화가 나온 것 같다. 컷, 짜임새 등에서 스릴러답게 맞아떨어졌다. 영화를 보자마자 이창희 감독에게 ‘빨리 다음 것을 준비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몽타주’ 때도 2/3를 찍었을 때 좋은 느낌이 들어서 비슷한 말을 했다. 흥행하는 것은 배급이 잘 돼야 할 텐데 일단 연기를 다 한 지금은 우리의 손을 떠난 것이라 생각한다. 좋은 결과가 따를 것이라고 본다.”
‘사라진 밤’은 이창희 감독의 장편 입봉작. 베테랑 배우 김상경의 입장에서는 신인 감독과의 작업이 또 다른 도전이었을 터다. “너무 놀란 게, 마치 10편 찍은 감독 같이 유연했다. 다른 배우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 들어주면서 자를 줄도 알았다. 최종 101분 분량이 나왔는데 커팅이 9분 정도 나왔다. 보통 잘해도 30분 정도 커팅이 나오는데 그렇게 찍기도 힘들다. 정확한 계산이 밑바탕 돼 있었다. 예전에 연출부를 하면서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았다.”
“이창희 감독의 원래 성격도 대범함이 있다. 이창희 감독과 술도 많이 마시며 영화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자기가 납득이 안 된다고 해서 선배인 내 얘기를 무조건 듣지만은 않았다. 합리적으로 촬영했고 감독적인 소양이 돼 있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김희애 선배님이 찍자고 하면 웬만한 감독이면 일단 찍고 볼 텐데, 이 감독은 거절할 줄도 안다. 귀엽게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없어도 됩니다’라고 거절도 유연하게 잘했다.(웃음) 오랜만에 영화판에 제대로된 신인감독이 나온 것 같았다.”
김상경은 이번에 감독뿐만 아니라 함께한 배우들까지 최고의 합을 자랑했다. ‘사라진 밤’은 국과수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최소한의 캐릭터 분배로 효율적인 촬영을 한 ‘가성비 甲’ 영화다. 여기엔 배우들의 흡입력 있는 열연이 큰 효과를 가져왔다. “김희애 선배는 신의 한수였다. 무게감이 달라졌던 것 같다. 캐스팅 과정에서 김희애 선배가 한다는 걸 알고 꼭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신뢰가 갔다.”
“진한 역할도 되게 좋았는데, 그걸 (김)강우가 훌륭하게 잘 해줬다. 그 두 분은 정말 신의 한수였다. 스릴러에서 인물들이 적재적소에 잘 배치된 것 같았다. 강우랑은 연극을 많이 안 했는데 걔네 동기에 연출 전공 아이들과 친했다. 강우는 아주 잘생긴 우리 후배였다. 지금도 하나도 안 늙었다.(웃음) ‘하하하’ 때 격투신으로 호흡을 맞추고 또 만났는데, 강우는 이번에 작품을 아주 제대로 만난 것 같다. 어려운 역할을 그만큼 잘 해냈다.”
‘사라진 밤’에서는 허술한 김상경을 만나볼 수 있는데, 이 모든 장면이 그의 철저한 계산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김상경은 “애드리브는 없었다”고 말한다. “원래 가벼운 캐릭터라는 게 깔려 있었지만 까치집 머리, 위장약을 먹으며 등장하는 신 등 모두가 대본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원래 대본대로 한다. ‘생활의 연애’ 때 추상미 씨가 춤추고 난 후 ‘다 끝난 건가요?’라고 대사한 게 내 유일한 애드리브다. 나는 시나리오가 잘 짜여있으면 오히려 애드리브가 독이 된다고 생각한다.”
애드리브 아니어서 그 너스레와 자연스러움이 더욱 신기하다. 그간 예리한 형사만 보다가 허술한 형사를 맞닥뜨리니 큰 변신은 맞는 것 같다. “드라마로는 ‘가족끼리 왜 이래’로 웃긴 걸 보여줬는데 영화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연기할 때도 재미있었다. 순간순간 괜히 있어보이게 단서도 짚어내고 할 때 뿌듯했다. 이번 이후로 앞으로도 영화, 드라마를 연기할 때 편안해질 것 같다. 나이 많으신 분들은 예전의 ’대왕세종‘ 때 이미지를 생각하고 아직도 어려워한다. 사우나에서 머리 하야신 분들이 일어나시기도 했으니.(웃음)”
“배우로서 여러 캐릭터를 보여주는 게 보람이라 생각한다. 예전부터 연기를 배울 때 인물을 분석하고 전사를 연구했다. 내가 가진 소스로 전혀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내는 거라 생각해서다. 지금까지의 모든 캐릭터에는 다 내가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대왕세종’에서도 내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유쾌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프로덕션 기간에 어떻게 하면 다 같이 재미있게 지낼까를 생각한다. 기자분들과 만나도 한 시간이 나로 인해 유쾌하길 바란다. 하루를 어떻게 살든지 유쾌하고 행복했으면 한다.”
과거 30대 중반까지는 영화를 까칠하게 보고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했다는 김상경은 연차가 늘면서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영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면에서 전작 ‘1급기밀’은 꼭 성공을 해야 했던 영화라고 아쉬워했다. “아침 일찍, 새벽 이렇게 영화가 있으면 어떻게 영화를 보겠느냐 생각했다. 관객수 20만 명 정도에서 끝났지만 그 영화에 관을 제대로 줬다면 100만은 넘었을 것이다. 영화 흥행에서 배급이 중요하긴 하다. 지금은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거다.”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배급사의 크기로 성패가 갈리는 영화계의 현실을 꼬집은 김상경은 “‘1급기밀’은 장르적 제한이 있었고 무거웠다면, ‘사라진 밤’은 상업영화의 범주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상업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무섭지도 않다. 만듦새가 너무 좋았다”며 “요즘엔 SNS나 인터넷의 영향력이 너무 세져서 금방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는 것 같다. 기자분들 리뷰도 좋고 일반 시사회를 본 사람들의 반응도 좋다. 파급효과가 좋을 것 같다. 첫 주 배급관만 잘 잡으면 소문이 나서 더 볼 영화인 것 같다. 그 영화가 보는 필요한 양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라진 밤‘도 충분한 만듦새로 만들었다. 극장놀음에서 망가지면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곧 7일 개봉하는 ‘사라진 밤’의 배급 현황을 지켜보게 되는 대목이다.
벌써 20년차. 이번 ‘사라진 밤’이 김상경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좋은 필모가 생긴 것 같다. ‘1급기밀’도 마찬가지고 굉장히 뿌듯하다. 이틀 전에 가족들과 용인에 달맞이 행사를 갔다. 거기서 사람들이 ‘1급 기밀 파이팅‘이라고 해줬다. 의미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기존의 형사와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헐렁하고 유머러스한 캐릭터를 되게 오랜만에 했다. 지금까지 정의롭거나 진지한 왕 역을 많이 했는데, 최근 달마다 다른 영화로 다른 캐릭터를 보여줘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서경스타 한해선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