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현수막에 미투운동 지지? 웃기지 마시라. 우리 의원실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나 있으세요?” “근로시간 단축도 내 동료들이 주당 80시간씩 일해 만든 성과입니다.”
법을 만드는 국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한 법의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다. 의원들은 너도나도 ‘미투’를 외치고 있지만 국회 보좌진은 정작 상시적 성추행에 노출돼 있다. 근로시간 단축 입법 성과 뒤에는 노동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보좌진이 있었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철저히 외면한 채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국회의 위선에 보좌진도 용기 내 하나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미투’ 위선에 뿔났다=“함부로 응원하네, 마네 하지 마세요. 술자리서 성희롱 발언을 내뱉던 의원님이 아직 눈에 선합니다.” 국회 보좌진의 커뮤니티인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 익명으로 제보된 글이다. 미투운동이 번지면서 보좌진의 피해사례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의원실에서 벌어지는 문제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던 의원들이 미투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서자 내부고발이 폭발하게 된 역설적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한 여당 의원실 소속 비서관은 “국회가 워낙 폐쇄적 구조다 보니 다들 참고 지냈는데 미투운동에 앞장선다는 의원들을 보고 화가 나 입을 여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 보좌진은 커뮤니티를 통해 “영감들(의원들) 중에 자기 방(의원실)에 성추행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피해자를 내보내고 가해자는 계속 남겨두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의원들의 이중적 태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국회 보좌진이 이처럼 성폭력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 배경에는 국회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의원 한 명이 해당 의원실 보좌진의 생살여탈권을 오롯이 쥐고 있는 국회의 인사 시스템은 피해자들이 쉽게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의원실에 텐트, 노동인권 사각지대=10월 국정감사 기간은 보좌진에 죽음의 계절이다. 의원실 한복판에 텐트를 치고 새우잠을 자고 ‘너는 고작 침낭이냐, 난 간이침대도 샀다’는 대화가 벌어지는 등 웃지 못할 풍경도 연출된다. 이 같은 현실에 보좌진 사이에서는 ‘국회가 바로 치외법권 아니냐’는 자조적 목소리도 나온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지난달 극적으로 근로시간 단축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숨은 주역인 보좌진에 주 52시간 근로시간은 언감생심이다. 한 여당 소속 환노위의 한 관계자는 “근로시간 단축 문제를 매듭지은 데서 오는 성취감도 크지만 허탈감도 큰 게 사실”이라면서 “국회 보좌진의 근로시간 단축은 앞으로도 요원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한 보좌진은 커뮤니티에 글을 남겨 “근로시간 단축 법안은 보좌진이 절대 누릴 수 없는 법률”이라면서 “그 법은 분명 보좌진이 만들었을 테지만 그 법을 절대 누릴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갑질 법안 쏟아내지만 사노비가 된 보좌진=‘갑질’도 국회의 고질적 병폐다. 앞서 지적된 의원의 절대적 인사권과 의원-보좌관-비서관-비서로 이어지는 공고한 피라미드 구조에서 국회 갑질 문화가 탄생했다. 국회는 최근 부하에게 직무 관련성 없는 지시를 내리는 상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일명 ‘박찬주법’, ‘막말 판사’를 막기 위한 법원조직법 개정안, 가맹본부 갑질을 막기 위한 가맹사업법 개정안 등의 갑질 방지 법안을 줄줄이 발의했다. 군·법조계, 나아가 업계의 갑질 행태에 경종을 울리겠다고 나섰지만 국회 내 갑질 문화는 방조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보좌진의 사노비화는 대표적 국회 갑질 사례다. 실제로 보좌진 커뮤니티에는 의원 가족 수행업무와 관련한 글이 다수 올라와 있다. 한 보좌진은 익명 글을 통해 “영감(의원) 부인 수행하려고 국회에 들어온 게 아니다”라면서 “의원회관의 오랜 적폐 중 하나”라고 꼬집었다.